백제의 멸망?②
이렇게 고구려의 남침 의도가 점점 가시화되자 다급해진 것은 물론 백제다. 광개토왕(廣開土王) 때 역전된 이래 백제는 한번도 단독으로 고구려와 맞붙어 승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아신왕(阿莘王) 이후 전지왕(腆支王) - 구이신왕(久爾辛王) - 비유왕(毗有王)의 치세 50여 년 동안 백제는 늘 고구려의 남침을 최대의 국가적 고민으로 간직해왔다. 나름대로 대비는 하지만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건 누가 봐도 분명하다. 따라서 백제가 기댈 것은 오로지 외교 즉 어떻게든 동맹을 확대하는 것뿐이다.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이제 마지막 외교로써 다가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스폰서인 북위와 접촉하는 것이다. 장수왕(長壽王)이 남조에까지 접근한다면 나는 북조에 접근하겠다. 남조의 송은 일단 구워삶아놨으니 고구려의 흔들기 작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북위마저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고구려의 의도는 불발로 끝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472년 드디어 개로왕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서신이 뱃길로 북위에 전달된다. 그러나 당시 북위의 황제가 장수왕과 마찰을 빚었던 헌문제에서 불과 3년 전에 그 아들인 효문제(孝文帝)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일단 개로왕의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조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 대국을 섬기고자 하는 사무치는 정성을 달랠 길이 없다”는 사뭇 감동적인(?) 글월에도 불구하고 효문제는 “고구려가 본국을 섬긴 지 오래도록 별다른 결례를 한 일이 없으니 어찌 고구려를 정벌하겠느냐”며 오히려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이른다. 효문제의 진의는 물론 고구려의 백제 정벌을 승인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개로왕은 북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조공도 끊어 버린다.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그로부터 3년 뒤 장수왕(長壽王)은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침을 개시했다.
대병력은 아니지만 철기병 위주의 고구려 정예병을 백제는 막을 힘이 없었다. 앞서 보았듯이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이고 고구려의 보복을 걱정하여 산 속에 도성을 쌓아 대비했으나(남한산성) 그 조상의 슬기조차 백제의 운명을 건져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근초고왕은 후손에게 복을 베풀기는커녕 화를 심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성문이 불타는 것을 보고 개로왕(蓋鹵王)은 뒷문으로 빠져 달아났다가 고구려의 추격군에게 잡혀 백제를 버린 매국노들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으니까【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승려 도림(道琳)의 이야기다.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하기 전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 궁실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온 것처럼 위장하고 개로왕과 바둑친구가 되어 환심을 산다. 그리고는 개로왕에게 백제의 도성은 하늘이 내린 지세이니 걱정할 것 없다면서 왕궁을 확장해서 위세를 과시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백제가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무리한 축성 사업으로 방어망이 약해진 데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을 유발한 장수왕(長壽王)의 첩보전도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고구려의 남진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고,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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