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월의 끝③
과연 그 기지를 발판으로 성왕(聖王)은 이윽고 그 이듬해에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참에 신라는 거칠부를 시켜 죽령 이북에서 철령 이남까지 고구려의 군 10개를 손에 넣었다(죽령은 오늘날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이고 철령은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니까 당시 신라는 강원도 전체를 차지했다고 보면 된다. 이것으로 신라의 영토는 무려 두배로 늘어났다). 백제는 원하던 한강 하류를 수복했고, 신라는 그 동쪽 한반도 중부의 넓은 땅을 새로 얻었다. 동맹의 완벽한 합작이다. 성왕은 이렇게 여겼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진흥왕(眞興王)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다.
도저히 십대의 청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흥왕은 교활했다. 강적인 고구려를 물리쳤으니 이제 더 이상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다. Now or never!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성왕(聖王)이 손에 든 축배를 미처 다 마시기도 전인 553년에 진흥왕은 한강 상류 주둔군을 곧장 하류로 진격시킨다. 말할 것도 없이 백제에 대한 기습이다. 진흥왕의 새가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자 100여 년 동안 반도 남부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던 나제동맹이 깨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한강 하류를 장악한 뒤 진흥왕은 백제의 옛 도읍이 있던 곳 바로 동쪽인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신주(新州)라는 기지를 설치하고 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무력에게 수비를 맡겼다【백제를 기습하기 직전 진흥왕은 도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황룡 한 마리가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을 보고 궁궐 대신 절을 지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절의 이름은 당연히 황룡사다. 그러나 하필 백제와의 오랜 동맹을 깨고 기습 작전을 계획할 즈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뭘까? 혹시 그건 진흥왕이 동맹의 배신을 미리 염두에 두고 연막삼아 꾸민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해서 건립되기 시작한 황룡사는 17년간의 공사 끝에 569년에 완공되어 한반도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여기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무게 20톤의 거대한 장육상이 안치되었으며, 선덕여왕 때(645년) 높이 80미터로 추정되는 목탑이 보태졌고, 경덕왕 때(754년) 무게 300톤의 대종이 추가되었다. 고려시대까지 황룡사는 전국민의 관광지이자 학생들이 즐겨 찾는 수학여행 코스로 애용되었겠지만, 아쉽게도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목탑까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물론 장육상은 몽골 병사들이 녹여 금만 채취해갔다. 목탑과 장육상은 진평왕의 옥대와 함께 신라 3보였으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백제 성왕(聖王)은 어안이 벙벙하다. 오죽했으면 그 사건이 있고서도 3개월 뒤 진흥왕(眞興王)에게 딸을 후궁으로 내주기까지 했을까? 한동안 동맹이 깨졌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던 그가 비로소 닭 쫓던 개의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때는 이듬해인 554년이다. 그제야 분노한 그는 잃어버린 닭을 찾아 닭의 꼬리격인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을 대가야와 함께 공격하는데, 결국 그것은 최악의 사태를 낳고 만다. 그를 막은 것은 신주에서 내려온 김무력, 금관가야의 정통 후손이었으니 곁가지인 대가야가 당할 수 없다. 더구나 금관가야와 신라는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고 백제와 대가야는 각각 신라와 금관가야의 배신에 대한 울분에 차 있다. 애초에 승부는 결정되어 있는 상황, 그러나 이 전투에서 성왕(聖王)은 패배를 넘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한다.
마음놓고 있다가 배신을 당했고 섣불리 보복에 나섰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성왕으로서는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동맹이 깨진 것도 그렇거니와 국왕이 전사한 비극은 두 나라의 관계를 급전직하로 몰았다. 나중에도 보겠지만 이 문제는 두고두고 두 나라 간의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남게 된다.
▲ 배신의 기념비 100여 년이나 이어져오던 나제동맹은 진흥왕(眞興王)의 기습으로 일순간에 허무하게 깨어졌다. 사진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서 세운 네 개의 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북한산 순수비다. 어떤 면에서는 ‘배신의 기념비’라고 해야겠지만, 사실 진흥왕의 배신을 탓하기 이전에 백제가 지나치게 신라를 얕보았던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당시 백제 성왕은 오로지 고구려 전선에만 집중했고, 신라를 보조 세력으로만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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