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역전되는 역사
밀월의 끝
지증왕과 법흥왕의 2대에 걸쳐 급속히 진행된 신라의 ‘재건국’ 과정을 보면 후발주자의 이득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구려와 백제가 수백 년 동안 서서히 이룬 선진화 프로젝트를 신라는 불과 50년도 못되는 기간에 완수했다. 이것으로 새 나라의 하드웨어 정비는 끝났다.
뒤이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초기에 신라는 소프트웨어 분야까지 손을 댄다. 544년에는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가 완공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居柒夫)가 신라 최초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를 편찬했다【지금까지 나온 삼국시대 인물들의 이름이 대개 그렇듯이 이사부와 거칠부라는 희한한 이름도 역시 이두 이름이다. 한자로는 異斯夫, 居柒夫로 표기되어 있지만 한자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거칠부는 황종(荒宗)이라고도 쓰며, 이사부는 태종(苔宗)이라고도 쓴다. 전혀 닮지 않은 거칠부와 황종, 이사부와 태종이 어떻게 같은 이름이 될까? 이 의문은 거칠부, 이사부가 음(진짜 이름)이고, 황종, 태종이 뜻(표기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면 해결된다. ‘황(荒)’은 거칠다는 뜻이고 ‘종(宗)’은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의 보, 즉 부(夫)와 같은 뜻이다(먹보나 울보를 생각하면 되겠다). 또 ‘태(苔)’는 이끼라는 뜻이며 이끼는 옛말로 ‘잇’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황종(荒宗)’과 ‘태종(苔宗)’은 각각 거칠부(터프가이?)와 이사부(이끼 사나이?)를 뜻으로 옮긴 이름이 된다(김부식은 이두를 알지 못했으므로 거칠부 옆에 ‘혹은 황종이라고도 한다’는 주석을 붙여 놓았다)】. 이미 고구려에는 『유기(留記)』라는 역사서가 있었고(600년에 『신집新集』으로 증보, 개수되었다),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말년인 375년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했으니 그에 비하면 시기적으로 크게 늦은 것이었지만, 이제 신라는 공인 종교와 역사서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아쉽게도 그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지금 모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흥왕(眞興王)의 의도는 신라를 문화 대국으로 만들려는 데 있지 않았고, 당시 신라의 사정도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신라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법흥왕 때 길이 트인 중국과의 외교 루트를 확보하는 일이다. 50년간 중국 문물의 세례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처럼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니 안정적인 수입 개방이 이루어진다면 신라의 미래는 장밋빛이 될 것이다. 때마침 신라 최초로 양나라에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이 549년에 부처의 사리를 가지고 돌아온 일은 선진국에 대한 선망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당시 신라의 모든 관리들이 흥륜사 앞에 나와 각덕의 금의환향을 환영했다).
그동안 백제와의 동맹은 신라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백제만 해도 신라로선 배울 게 많은 선진국이었지만, 백제를 통해 중국 문물을 접한 경험은 신라에게 크나큰 자극제가 되었다. 더구나 고구려는 엄연히 나제동맹(羅濟同盟)이 맺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상대하려 하지 않고 주로 백제만 공격했다. 따라서 신라는 늘 있어 왔던 왜구의 침략을 견디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전란의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상황이 오로지 신라의 도약을 위해 편제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다. 이 시기에 장기적인 국가 발전의 초석을 놓지 않으면 도약의 계기를 놓칠 수도 있으리라.
551년 아직 소년왕의 티를 벗지 못한 열일곱 살의 진흥왕(眞興王)은 어머니의 섭정이 끝나고 친정(親政) 체제를 시작하자마자 중대한 결심을 굳힌다. 120여 년 동안 신라의 성장에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했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기로 한 것이다. 새는 알을 부수고 나온다. 그 새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했던가? 원래 껍질이란 자신이 연약할 때는 보호막이 되어주지만 더 이상의 성장을 위해서는 깨어져야 하는 법이다. 진흥왕은 기꺼이 아프락사스가 되려 한다.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꾼 것은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아직 나이 어린 진흥왕(眞興王)이 그렇게까지 노회한 구상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 동맹으로 이득을 본 것은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왕(東城王) 때 재건된 백제는 무령왕 대에 다시금 고구려와 맞설 만한 전력을 갖추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잃은 반도 중부, 한강 하류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한다. 백제가 출발한 곳이자 400년 동안 도읍으로 삼았던 그 고향이 아직도 적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는 것은, 백제의 국왕이라면 당연히 가장 가슴 아픈 일일 수밖에 없다. 538년 성왕은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긴다. 60년 전 고구려의 남침으로 천도한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계획적인 천도다. 무엇을 위한 계획일지는 뻔하다. 때마침 고구려는 최전성기인 장수왕 시대를 정점으로 서서히 약화되고 있는 데다가 북방에 돌궐이라는 새로운 강적의 출현으로 남부 전선이 흐트러져 있었다. 백제에겐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다.
드디어 550년 성왕은 1만의 군대를 주력으로 삼고 신라군과 가야군을 보조로 삼아 북진길에 오른다. 도살성(道薩城, 지금의 천안)을 빼앗아 서전(緖戰)을 성공적으로 장식했으나 그것도 잠시, 고구려는 즉각 역공에 나서서 백제의 금현성(金峴城, 지금의 조치원 부근)을 빼앗으니 피장파장이다. 그러나 방어하는 측은 고구려 하나지만 공격하는 측은 연합군이라는 이점이 있다. 조연들이 이렇게 오프닝을 장식하니 이제는 이 드라마의 주연이 나설 차례다. 진흥왕(眞興王)은 양측 군대가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를 시켜 기습으로 두 성을 모두 빼앗고 수비병력까지 두어 두 나라의 넋을 빼놓는다. 문제는 백제의 성왕이 여전히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장차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수복하는 데 필요한 전초기지를 확보했을 뿐이라는 진흥왕의 발뺌에 성왕은 쉽게 속아 넘어간다. 어차피 성왕으로서는 그 두 성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으니 동맹국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과연 그 기지를 발판으로 성왕(聖王)은 이윽고 그 이듬해에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참에 신라는 거칠부를 시켜 죽령 이북에서 철령 이남까지 고구려의 군 10개를 손에 넣었다(죽령은 오늘날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이고 철령은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니까 당시 신라는 강원도 전체를 차지했다고 보면 된다. 이것으로 신라의 영토는 무려 두배로 늘어났다). 백제는 원하던 한강 하류를 수복했고, 신라는 그 동쪽 한반도 중부의 넓은 땅을 새로 얻었다. 동맹의 완벽한 합작이다. 성왕은 이렇게 여겼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진흥왕(眞興王)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다.
도저히 십대의 청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흥왕은 교활했다. 강적인 고구려를 물리쳤으니 이제 더 이상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다. Now or never!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성왕(聖王)이 손에 든 축배를 미처 다 마시기도 전인 553년에 진흥왕은 한강 상류 주둔군을 곧장 하류로 진격시킨다. 말할 것도 없이 백제에 대한 기습이다. 진흥왕의 새가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자 100여 년 동안 반도 남부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한강 하류를 장악한 뒤 진흥왕은 백제의 옛 도읍이 있던 곳 바로 동쪽인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신주(新州)라는 기지를 설치하고 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무력에게 수비를 맡겼다【백제를 기습하기 직전 진흥왕은 도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황룡 한 마리가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을 보고 궁궐 대신 절을 지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절의 이름은 당연히 황룡사다. 그러나 하필 백제와의 오랜 동맹을 깨고 기습 작전을 계획할 즈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뭘까? 혹시 그건 진흥왕이 동맹의 배신을 미리 염두에 두고 연막삼아 꾸민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해서 건립되기 시작한 황룡사는 17년간의 공사 끝에 569년에 완공되어 한반도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여기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무게 20톤의 거대한 장육상이 안치되었으며, 선덕여왕 때(645년) 높이 80미터로 추정되는 목탑이 보태졌고, 경덕왕(景德王) 때(754년) 무게 300톤의 대종이 추가되었다. 고려시대까지 황룡사는 전국민의 관광지이자 학생들이 즐겨 찾는 수학여행 코스로 애용되었겠지만, 아쉽게도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목탑까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물론 장육상은 몽골 병사들이 녹여 금만 채취해갔다. 목탑과 장육상은 진평왕(眞平王)의 옥대와 함께 신라 3보였으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백제 성왕(聖王)은 어안이 벙벙하다. 오죽했으면 그 사건이 있고서도 3개월 뒤 진흥왕(眞興王)에게 딸을 후궁으로 내주기까지 했을까? 한동안 동맹이 깨졌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던 그가 비로소 닭 쫓던 개의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때는 이듬해인 554년이다. 그제야 분노한 그는 잃어버린 닭을 찾아 닭의 꼬리격인 관산성(管山城, 지금의 옥천)을 대가야와 함께 공격하는데, 결국 그것은 최악의 사태를 낳고 만다. 그를 막은 것은 신주에서 내려온 김무력, 금관가야의 정통 후손이었으니 곁가지인 대가야가 당할 수 없다. 더구나 금관가야와 신라는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고 백제와 대가야는 각각 신라와 금관가야의 배신에 대한 울분에 차 있다. 애초에 승부는 결정되어 있는 상황, 그러나 이 전투에서 성왕(聖王)은 패배를 넘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한다.
마음놓고 있다가 배신을 당했고 섣불리 보복에 나섰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성왕으로서는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동맹이 깨진 것도 그렇거니와 국왕이 전사한 비극은 두 나라의 관계를 급전직하로 몰았다. 나중에도 보겠지만 이 문제는 두고두고 두 나라 간의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남게 된다.
▲ 배신의 기념비 100여 년이나 이어져오던 나제동맹은 진흥왕(眞興王)의 기습으로 일순간에 허무하게 깨어졌다. 사진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서 세운 네 개의 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북한산 순수비다. 어떤 면에서는 ‘배신의 기념비’라고 해야겠지만, 사실 진흥왕의 배신을 탓하기 이전에 백제가 지나치게 신라를 얕보았던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당시 백제 성왕은 오로지 고구려 전선에만 집중했고, 신라를 보조 세력으로만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흥왕(眞興王)은 이제 마음껏 휘파람을 불 수 있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에 대가야가 참여한 것은 그에게 좋은 빌미를 주었다. 이 참에 선왕이 남긴 숙제를 해결하자! 그래서 이듬해부터 그는 본격적인 가야 정벌에 나선다. 그렇잖아도 그는 4년 전 가야 출신의 우륵(于勒)이라는 음악가가 들려준 가야금의 매혹적인 선율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창녕을 정복하고 여기에 완산주를 설치하니 이제 가야는 거의 손 안에 들어왔다【풍부한 철광산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던 가야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신라보다 확실히 강국이었다. 한창 때 가야는 백제와 일본의 중계 무역에다 철을 주요 수출품으로 삼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도약의 계기를 맞아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게 우선 결정적인 결함이었고, 게다가 4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침략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이후 가야는 5세기 후반에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재기에 성공했으나 끝내 연맹체라는 결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법흥왕 때 금관가야가 스스로 신라에 복속된 것도 그 때문이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새 가야연맹이 생겨났으나 알맹이가 빠진 연맹의 운명은 이미 멸망이 예고되어 있었다】. 결국 562년에 가야는 신라에 최후의 도전을 감행했다가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가야 정벌전에서 신라군 사령관은 이사부였으나 일등공신은 화랑 사다함(斯多含)이었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역시 어린 열아홉의 나이에 반도 중부까지 장악했다. 그런 진흥왕이었으니 열여섯의 어린 사다함이 높은 전공을 세운 것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만든 게 화랑(花郞)이다. 576년에 진흥왕(眞興王)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화랑의 전통을 제도화해서 일종의 사관학교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일세의 간웅이었던 그도 젊은 시절 백제를 배신한 게 늘 마음에 걸렸던 걸까? 화랑을 만든 것을 마지막 치적으로 남기고 진흥왕은 승복을 입고 불교에 심취하다가 마흔두 살의 한창 나이로 죽는다. 그가 재위했던 36년 동안 신라는 그 전까지 600년 동안 겪은 변화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었다.
▲ 가야 철갑 중세 유럽 기병의 갑옷을 연상시키지만 가야의 철갑이다. 유럽의 갑옷보다는 간소하므로 아마 말이 없어도 이 갑옷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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