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월의 끝④
그러거나 말거나 진흥왕(眞興王)은 이제 마음껏 휘파람을 불 수 있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에 대가야가 참여한 것은 그에게 좋은 빌미를 주었다. 이 참에 선왕이 남긴 숙제를 해결하자! 그래서 이듬해부터 그는 본격적인 가야 정벌에 나선다. 그렇잖아도 그는 4년 전 가야 출신의 우륵(于勒)이라는 음악가가 들려준 가야금의 매혹적인 선율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창녕을 정복하고 여기에 완산주를 설치하니 이제 가야는 거의 손 안에 들어왔다【풍부한 철광산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철기 문화를 발전시켰던 가야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신라보다 확실히 강국이었다. 한창 때 가야는 백제와 일본의 중계 무역에다 철을 주요 수출품으로 삼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도약의 계기를 맞아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게 우선 결정적인 결함이었고, 게다가 4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침략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이후 가야는 5세기 후반에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재기에 성공했으나 끝내 연맹체라는 결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법흥왕 때 금관가야가 스스로 신라에 복속된 것도 그 때문이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새 가야연맹이 생겨났으나 알맹이가 빠진 연맹의 운명은 이미 멸망이 예고되어 있었다】. 결국 562년에 가야는 신라에 최후의 도전을 감행했다가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가야 정벌전에서 신라군 사령관은 이사부였으나 일등공신은 화랑 사다함(斯多含)이었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역시 어린 열아홉의 나이에 반도 중부까지 장악했다. 그런 진흥왕이었으니 열여섯의 어린 사다함이 높은 전공을 세운 것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만든 게 화랑(花郞)이다. 576년에 진흥왕(眞興王)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화랑의 전통을 제도화해서 일종의 사관학교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일세의 간웅이었던 그도 젊은 시절 백제를 배신한 게 늘 마음에 걸렸던 걸까? 화랑을 만든 것을 마지막 치적으로 남기고 진흥왕은 승복을 입고 불교에 심취하다가 마흔두 살의 한창 나이로 죽는다. 그가 재위했던 36년 동안 신라는 그 전까지 600년 동안 겪은 변화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었다.
▲ 가야 철갑 중세 유럽 기병의 갑옷을 연상시키지만 가야의 철갑이다. 유럽의 갑옷보다는 간소하므로 아마 말이 없어도 이 갑옷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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