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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고구려의 육탄 방어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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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1장 역전되는 역사, 고구려의 육탄 방어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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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육탄 방어

 

 

양제(煬帝)는 대담하게도 고구려의 주요 성곽인 요동성(지금의 랴오양) 서쪽 부근에 자신이 머물 진을 차렸다. 그의 전략은 본군으로 랴오둥의 고구려 성들을 하나씩 부수는 한편 선박에 병력을 나눠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직접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런 공격측의 전략에 따라 방어하는 고구려도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이 두 전선에서 위기의 고구려를 구한 구국의 영웅 두 명이 등장한다.

 

수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인 내호아(來護兒)는 거칠 게 없다. 비록 고구려에도 수군이 있다지만 함선들의 길이만도 수백 리나 뻗을 정도의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수나라의 수군이 대동강 입구로 들어오는 동안 고구려의 선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순조롭게 대군을 상륙시킨 내호아는 곧바로 평양을 향해 북진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비로소 고구려군의 한 무리가 저항하는데 달걀로 바위치기가 따로 없다. 손쉽게 달걀을 깨버린 뒤 내호아는 내친 김에 후속부대들이 오기 전에 평양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측근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정예군 수만 명을 추려 평양으로 진격했다. 정예군은 도중에 맞부딪친 고구려군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며 평양성 안에 들어섰다. 그러나 너무 싱겁다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들은 이미 매복에 걸려 있었다. 영양왕의 동생인 건무(建武)가 지휘하는 고구려 정예군은 그들이 약탈에 전념할 때를 기다려 동시에 덮쳤다. 혼비백산한 내호아가 겨우 몸을 추슬러 성 밖으로 나왔을 때 뒤따라 온 병사들은 수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고구려군의 거센 추격으로 그들은 불과 얼마 전에 호기롭게 진격하던 길을 거슬러 배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런 양상은 북부 전선, 즉 랴오둥에서도 되풀이된다. 요동성은 수나라 본군의 집요한 공략을 받고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다른 성들도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돌궐과 위구르를 상대할 때처럼 벌판에서 먼지 날리며 한바탕 붙을 생각에 전의를 불태웠던 수나라 지휘관들은 속이 탔지만, 고구려군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성에 전념하고 있으니 도리가 없다. 결국 그들은 본군을 둘로 나누어 선발대를 고구려 영토 깊숙이 전진시키기로 한다. 선발대의 병력만 해도 무려 305천 명이니 사실 그걸로도 고구려 정복은 충분하다. 문제는 지쳐 버린 병사들이었다. 압록강변에 도착한 뒤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100일분의 식량과 각종 무기에 천막까지 주었으나 병사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조차 짊어질 힘이 없었다. 식량을 버리는 자는 죽이겠다고 을러대자 병사들은 남몰래 식량을 땅에 파묻기까지 했다.

 

사기는 이미 최저인 상태였으나 워낙 병력의 규모에서 앞선 탓으로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건너 기세좋게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고구려군 사령관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미 단신으로 적진 깊숙이 잠입해서 돌아보고 온 터라 적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평양성까지 중간이나 왔을까, 예상했던 대로 수나라 군은 식량이 떨어졌다. 그래도 고구려군은 싸우다 퇴각하기를 반복하며 좀처럼 정면으로 맞붙어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평양성까지는 왔으나 우중문과 우문술은 도저히 성을 함락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들에게 묘한 제의를 해온다. 여기서 군대를 돌려준다면 영양왕을 모시고 양제가 있는 곳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준다면야 오죽 좋으랴. 심신이 피곤한 탓에 그들은 분별력을 잃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나라 병사들이 등을 보이자 곧바로 고구려군의 화살이 빗발쳤다.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어 수나라 정예군이 싸우다 퇴각하기를 반복하는 식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결국 청천강에 이르러 수나라 병사들은 고구려군에게 덜미가 잡혔다. 절반은 강물에 빠져죽고 절반은 화살에 맞아 죽으니 이것이 우리 역사에 살수대첩이라 알려진 사건이다. 청천강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만에 450리를 도망쳐 간신히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그 수는 불과 2700명이었다.

 

 

 유물을 품은 강 살수대첩의 전적지인 청천강의 모습이다. 1300년 전 수나라 군사들이 퇴각하다가 몰살당했을 정확한 전적지는 알 수 없다. 워낙 많은 병사들이 죽었으니까 이 부근 어딘가를 파보면 아마도 당시의 부장품이 상당수 발굴될 것이다. 이곳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명들은 대부분 아직까지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살수는 보통명사였고 청천강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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