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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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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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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그러나 두 영웅이 공존할 수 없다는 원칙은 달라진 게 없다. 다만 앞서의 두 영웅이 영류왕(營留王)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면 이번에 자웅을 결할 두 영웅은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이다. 쿠데타라는 집권 방식도 닮은꼴이고 나이도 엇비슷한(연개소문의 출생 연도는 전하지 않지만 맡아들인 남생이 634년생인 것으로 미루어 598년생인 이세민보다 약간 아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민과 연개소문은 점차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맞붙어야 할 호적수로 떠오른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그렇잖아도 구실을 찾고 있던 당 태종에게 행동에 나설 계기를 주었다. 중국에 맞서는 고구려, 그리고 그 고구려와 결탁한 백제, 이제 그는 임시 파트너로 여겨왔던 신라에게서 임시라는 딱지를 떼어주고 정식 파트너로 삼는다. 때마침 연개소문이 신라 북변을 침공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사신을 보내 추궁함으로써 신라를 두둔하고 나섰다. 연개소문은 신라와의 해묵은 숙제가 있음을 주장했고 당나라 사신은 지나간 일을 왜 따지느냐고 말했지만, 서로 간에 그것은 한바탕 붙기 위한 구실일 따름이다. 드디어 당 태종에게는 고구려 원정을 위한 모든 명분이 축적되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땅이라는 전통적인 침략의 변이외에 새로 보태어진 명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연개소문에 대한 증오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통일제국의 역사적 사명을 정확히 드러내는 명분이다. “사방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이를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군신들의 생각은 황제와 달랐다. 연개소문에 대한 적의나 고구려 정벌의 정당성에서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태종의 원정을 만류했다. “랴오둥은 길이 멀어[원래 랴오, 즉 요라는 땅이름부터가 멀다는 뜻이다]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고구려는 수성을 잘 하여 정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이 말은 고구려 정벌의 어려움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사실 이세민도 ()을 버리고 말()로 가는 격이라고 말했으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으로써 역()을 치는 것"이라며 원정을 정당화했으니 애초부터 그에게는 고구려 정벌의 야망이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645년 드디어 유주에 전 병력을 집결시키고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수 양제의 패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준비한 덕분일까? 아무튼 스타트는 순조로웠다. 병력은 수나라 때보다 훨씬 적어 17만 정도였지만 어차피 수가 많다고 해서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수나라의 실패에서 배운 바 있다.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어떻게 공략할 것이냐다. 과연 랴오허를 건넌 당나라 본군은 개모성(지금의 푸순)을 함락시켜 초장부터 개가를 올린다. 곧이어 산둥에서 출발한 수군이 랴오둥 반도 끝부분의 비사성(지금의 다롄)을 점령하여 호응한다. 성 하나 제대로 점령하지 못하고 랴오둥 들판을 헤맸던 수나라 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요처는 수 양제가 집요하게 공략하고서도 끝내 정복하지 못했던 요동성이다. 요동성 앞에 이른 태종은 성을 완전 포위하고 해자를 메우는 작업까지 손수 거들면서 공성에 주력한다. 포차로 돌을 날리고 충차로 부딪기를 수십 일, 드디어 그는 요동성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당시 고구려군은 1만 이상이 전사하고 1만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성 주민 4만과 식량 50만 석이 적의 손으로 넘어갔으니 요동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믿었던 요동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황급히 고혜진(高惠眞)과 고연수(高延壽)에게 전 병력이나 다름없는 15만의 대군을 주어 당나라의 다음 공략지인 안시성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두 지휘관은 서로 의견 충돌을 빚은 데다 당 태종이 직접 짠 계략에 넘어가 대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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