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1 약한 고리 끊기②
660년 봄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 595~667)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13만의 대군을 배에 실어 인천 앞바다로 보냈다. 거기서 당군은 신라군과 접선한다(여기서도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한 것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백제 원정의 기본 방침은 이미 태종 때 세워져 있었으니 필요한 건 세부 계획뿐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신라와의 분업이다. 백제 정벌이야말로 신라가 바라마지 않던 꿈, 따라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분업 구도에서 신라가 맡은 임무는 그다지 적극적인 게 아니다. 신라의 가장 큰 임무는 전투보다 ‘보급’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군이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는 동안 신라군은 동쪽의 공략을 담당하겠지만, 전투의 주력은 아무래도 당군이었고, 무엇보다 작전의 모든 지휘권은 소정방을 비롯한 당군 지휘관들에게 있었다.
일찍이 고구려 정벌에서도 중국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은 바로 군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장성의 북변에서 랴오둥까지 천 리가 넘는 길을 원정하면서도 출발할 때부터 군량을 가지고 가야 했으니 당연히 대규모의 보급 병력이 필요했으며, 오히려 그들이 정작 필요한 전투 병력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앞서 본 것처럼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는 보급 병력이 전투 병력의 두 배를 넘었다). 현지에 있는 신라가 보급을 맡았으니 이젠 그런 곤란을 겪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전투군으로만 이루어진 13만의 병력은 홀가분하게 산둥에서 배를 타고 신라군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상륙한다.
‘보급대장’ 격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자리잡고 태자인 김법민을 보내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가 소정방을 맞게 했다. 여기서 신라 측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은 다음 당군은 다시 배에 올라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를 향했고 신라군은 예정대로 동쪽의 물길로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으로 향하기로 한다. 그러니 사실 성충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백제로서는 탄현과 기벌포를 막아야 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의자왕(義慈王)은 그 뻔한 방어책을 두고서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원래 나라가 망하려면 간신들이 판치는 법이다. 의자왕은 일찍이 성충과 뜻을 같이 하다가 유배되어 있던 좌평 흥수(興首)에게 의견을 구해 다시금 탄현과 기벌포라는 해답을 얻었으나, 홍수를 시기하는 대신들은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온 다음에, 그리고 당군이 백강에 들어선 이후에 공격하자는 해괴한 해법을 내놓는다. 분별력을 잃은 의자왕은 그들의 의견을 좇았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어도 달라질 건 없다. 백제 왕실에서 논의가 분분하던 그 무렵에 이미 5만의 신라군이 탄현을 넘었고 당군을 실은 함대는 백강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 백제의 세 충신 부여 삼충사에 소장된 계백의 영정이다. 이곳에 모셔진 백제의 3대 충신(계백, 성충, 흥수)이 하필이면 모두 나라가 멸망할 무렵의 인물이라는 게 백제의 비운을 말해준다. 계백은 세 충신 가운데서도 가장 비장한 죽음을 맞았기에 이후에도 충절의 표본으로 널리 존경받았으며, 특히 조선시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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