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새 주인
성공하지 못한 개혁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용의 머리로 시작했다가 뱀의 꼬리로 끝나자 그렇잖아도 좌초할 지경인 송나라 호는 더욱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더구나 송 나라가 낭비해 버린 ‘찬스 카드’는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힘의 공백 상태였던 북방에서 새 주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란을 대체한 여진이 바로 그들이다.
거란과 고려가 압록강 일대를 두고 흥정을 벌일 무렵 여진은 두 강대국의 손아귀에 운명을 맡긴 약소 민족의 처지였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북풍이 거세어지는 시대인 데다 더구나 그들은 거란과 고려보다 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닌 민족이었다. 쇠가 달궈졌을 때 두드리지 못하면 좋은 연장을 얻을 수 없는 법, 카이펑을 함락시키고도 그냥 물러나 버린 거란과는 달리 여진은 랴오둥이나 만주에 안주하기보다는 중원 정복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실제로 북방 민족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이 점은 앞서 고구려의 전성기 때도 실감했던 사실이다). 송-요-고려의 3국이 정립을 이루고 있는 동안 여진은 서서히 결집되고 성장하면서 세대 교체의 조짐을 점차 가시화하고 있었다.
사실 고려도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에 이미 여진에 대비해서 여러 차례 북방의 방어를 강화한 바 있다. 하지만 거란과 접경한 한반도 서북변에는 압록강이라는 분명한 국경선이 있는 데 반해 그 동쪽의 여진에 대해서는 강역마저 명확치 않을 정도였으므로 딱히 방어라 할 만한 태세를 구축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적의 형체가 명확해야 대비든 뭐든 할 게 아닌가? 그래서 고려가 본격적으로 여진과의 경계선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때는 여진의 여러 부족이 서서히 국지적인 통일을 이루며 군소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는 11세기 후반부터다.
문종 때까지만 해도 여진은 고려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만주의 하얼빈을 근거지로 삼은 완안부족이 통일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면서 여진은 점차 한반도의 동북부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2세기부터는 지금의 함흥까지 진출했다. 그러자 고려의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더 이상 그 사태를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렇잖아도 어린 조카 헌종(獻宗, 재위 1094~95)의 왕위를 빼앗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던 그로서는 없던 구실이라도 만들고 싶은 판이었으니 이 참에 여진 정벌을 시도해서 성공한다면 꿩 먹고 알 먹기가 따로 없다【숙종은 1097년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고 5년 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유통 화폐인 해동통보(海東通寶)와 동국통보(東國通寶) 등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아마 비정상적인 집권을 새 제도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화폐를 주조하자는 제안을 한 사람은 송에 유학을 다녀온 숙종의 친동생이었는데, 그는 바로 고려에 천태종을 부활시킨 것으로 더 유명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다. 왕실에서도 스스럼없이 승려가 배출될 만큼 고려 왕실은 유학을 국가 운영의 골간으로 삼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불교를 숭상했다. 좋게 보면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고나 할까?】.
하지만 유목민족답게 기병 전술에 능한 여진은 오히려 엉성하게 편제된 고려 정벌군을 크게 무찌르며 기세를 올린다. 이때 숙종에게 발탁된 인물이 비운의 스타 윤관(尹瓘, ?~1111)이다. 기병 없이는 여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별무반(別武班)이라는 군대를 편성하는데, 이름 그대로 여진 정벌을 위해 별도로 창설한 임시 군대다. 비록 숙종은 별무반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1107년에 윤관은 드디어 별무반을 선봉으로 삼아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 원정에 나선다. 아무리 여진이 날랜 기병대를 가지고 있고 한창 끗발이 오르는 시기라 해도 변변한 국가조차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고려의 대군을 맞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이 전쟁은 윤관과 척준경(拓俊京, ?~1144)을 스타로 만들면서 고려의 압승으로 마무리 된다. 윤관은 함흥에서 길주에 이르는 지역에 성을 쌓고 개선했다.
내친 김에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다면 삼국시대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 전역이 한반도 왕조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고려는 어렵게 얻은 9성마저 오래 보유하지 못한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이 강력히 반발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든게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줘도 못 먹나’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개국 초부터 외쳐왔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진취적 기상은 이미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고려 조정에서 슬로건으로도 사용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대신들은 오히려 새로 개척한 땅이 너무 넓지 않느냐며 아우성이다. 대다수 대신들이 9성의 반환을 주장하는 판에 학문을 사랑하는 문화군주인 예종이 굳이 반대할 리 없다.
결국 여진에게서 평화 유지를 약속받는다는 조건으로 9성은 여진에게 반환되었고, 윤관(尹瓘)은 졸지에 개선장군에서 비운의 스타로 전락했다. 영토 개척의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관직까지 삭탈당한 윤관, 그나마 예종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을 끝내 물리치고 보호해준 게 다행이었다 할까?
사실 당시 욱일승천하는 여진의 기세를 감안하면 고려 조정의 비겁한 태도가 오히려 현실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9성을 둘러싸고 벌인 그 해프닝은 여진의 세력 확장에 엔진을 달아준 격이 되었다. 한 때 여진을 놓고 거란과 핑퐁 게임을 벌이던 거란과 고려는 어느새 서산에 지는 해가 되어 버렸고(하기야 고려는 별로 높이 떠본 적도 없긴 하지만) 이제 여진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9성을 돌려받은 지 불과 몇 년 뒤인 1115년에 여진은 드디어 나라를 이루고 금(金)이라는 국호를 채택하기에 이른다(거란과 달리 처음부터 중국식 국호를 정한 데서도 여진의 포부를 읽을 수 있다).
적에게서 배운다는 말은 바로 금나라로 변신한 여진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오랜 기간 거란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던 여진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일찍이 거란이 보여준 행보를 답습하는데, 그 속도가 훨씬 빠르고 규모도 훨씬 크다. 요나라가 그랬듯이 금나라도 맨먼저 착수한 사업은 고려 길들이기였다. 언제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던가 싶게 금나라는 건국 직후인 1119년에 고려에게 형제의 맹약을 강요한다. 9성의 자진 반납으로 기가 꺾인 예종은 여진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거란이 그랬듯이 여진의 목적은 한반도 정복에 있지 않았으니 그것은 후방 다지기에 불과하다. 이후 그들의 스피드는 더욱 빨라진다. 1125년에 그들은 마침내 랴오둥의 요나라를 멸망시켜 해방을 이루는가 싶더니 2년 뒤에는 송나라로 곧장 쳐들어가 현직 황제인 흠종과 전 황제인 휘종을 비롯하여 황족과 중앙 관료 3천 명을 잡아간다. 이것이 정강(靖康, 흠종 대의 연호)의 변(變)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이로써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어떤 점에서 송나라는 멸망을 자초한 감이 있다. 100년이 넘도록 요나라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있던 송나라는 여진의 등장을 반겼다. 이이제이일까, 원교근공일까? 그러나 주체의 힘이 약하면 그 어떤 전략도 공염불일 뿐이다. 송나라는 금나라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긋지긋한 요나라를 물리치려 했는데, 그 전략은 당장의 현실에 눈이 어두워 장기적인 판단력을 잃은 결과였다. 금나라의 도움으로 요나라를 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늑대를 물리치느라 호랑이를 집안에 불러들인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금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송나라는 다시 고려를 부추겨 연려제금(聯麗制金)을 시도하지만, 이번에는 고려의 내부 사정으로 좌절된다. 당시 고려는 이자겸(李資謙) 사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간신히 피랍을 면한 흠종의 동생이 남은 대신들과 함께 곧바로 남쪽으로 도망쳐 임안(지금의 항저우)을 도읍으로 삼고 송나라를 재건국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망명정부일 뿐이다. 어쨌든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새로운 송나라를 남송(南宋)이라 부르고 이전까지의 오리지널 송나라를 북송(北宋)이라 부른다. 역대 한족 제국의 완성태면서도 역사상 가장 허약한 제국이었던 송나라가 남송으로 명맥만 유지하게 되면서, 그렇잖아도 구심점이 없던 동아시아는 더욱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다. 일찍이 신라시대에도 당나라가 약화되면서 한반도에 심각한 후유증을 전달한 바 있었으니, 아마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터이다. 과연 그럭저럭 안정을 유지해오던 고려 정부는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맞아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 욕만 먹은 영토 개척 한창 기세가 뻗어나는 여진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윤관은 귀환길에 오르면서 내심 포상을 기대했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왜 쓸데없이(?) 영토를 개척했느냐는 개경 귀족들의 핀잔이었다. 그림은 윤관이 9성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인데, 아마 성 쌓기에 동원된 고려 백성들도 나중에 반환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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