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의 쿠데타
금나라의 전광석화 같은 팽창 정책으로 한때 동아시아의 삼각 정립을 이루었던 3국의 신세는 처량해졌다. 요나라는 완전히 멸망했고 송나라는 망명정권으로 전락했다. 홀로 남은 고려는 이미 여진과 형제 관계를 약속한 바 있지만 동아시아의 새 주인이 그 정도의 계약에 만족할지는 의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송을 멸망시킨 뒤 여진은 그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강요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유독 한 사람 당대 최고의 실력자만 홀로 금을 섬기자는 사금책(事金策)을 주장해서 마침내 관철시켰는데, 그는 바로 이자겸(李資謙, ?~1126)이라는 자였다. 당시 그는 지군국사(知軍國事, 앞서 ‘권지국사權知國事’의 경우처럼 ‘知’란 ‘맡는다’는 뜻이니, 군대와 국가의 총책임자라고 보면 되겠다)를 자칭하며 ‘왕 위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니, 그의 결정은 곧 국가의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왕건 이후 고려 왕실은 처음부터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근친혼으로써 왕족의 수를 늘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래서 왕족이 결혼하는 상대방의 집안도 충주 유씨, 황주 황보씨, 경주 김씨 등 몇 개의 가문으로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경향을 처음으로 깬 사람이 바로 현종이다. 황보씨인 어머니와 두 이모(헌정과 헌애)의 난잡한 사생활에 넌더리를 낸 탓일까? 그는 열세 명의 아내들 중 무려 열 명을 ‘고정된 처가’ 이외의 가문에서 받아들인다. 이것을 계기로 이후의 왕들은 관례상 첫 아내만 왕족 내에서 근친혼으로 얻었고 나머지는 다른 성씨인 지방 토호 가문의 딸들을 맞아들였다. 다시 왕건의 ‘육탄적인’ 통혼 정책으로 돌아간 셈인데, 이는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왕건처럼 외척 가문의 수를 늘려 왕권 강화를 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강화되는 건 왕권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왕실 내에서 근친혼이 행해질 때는 외척이라는 세력이 없었는데(외척 역시 왕족이었으니까), 다른 성씨의 왕비들을 맞아들이면서 새롭게 외척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자겸(李資謙)의 집안인 인주(지금의 인천) 이씨가 바로 그렇게 해서 성장한 세력이다. 하기야 건국 초기인 150년 전의 마구잡이 통혼 정책을 다시 썼으니 부작용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은 11남매를 두었는데, 집안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아들들보다 딸들이었다. 그의 세 딸이 모두 문종에게 시집을 가서 그 중 인예태후가 낳은 세 아들은 12대 왕인 순종(順宗, 1083년 즉위 3개월 뒤 병사)과 13대 선종(宣宗, 재위 1084~94), 15대 숙종이 됐으니 이보다 더 부러울 게 없다【그 사이에 재위한 14대 헌종은 선종의 아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삼촌인 숙종에게 곧 왕위를 넘겼는데, 이 과정에도 인주 이씨 가문이 연관되어 있다. 이자연의 손자 이자의는 겨우 열 살에 즉위한 헌종이 병약한 것을 기회로 여기고 자신의 조카를 즉위시키려 한다. 이것을 눈치챈 계림공이 먼저 선수를 쳐 이자의를 죽이고 조카인 헌종에게 왕위를 이양받아 숙종이 된다(숙종은 그 때문에 인주 이씨가 아닌 정주 유씨 가문에서 왕비로 택했다). 선종의 왕비 셋이 모두 인주 이씨였음에도 이자의가 친조카를 즉위시키기 위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은 이미 가문 내부에서 권력 다툼을 벌일 정도로 인주 이씨의 세력이 거대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이렇게 인주 이씨가 단연 고려 최대의 가문으로 떠오른 데 힘입어 이자겸(李資謙)은 일찍부터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서 초고속으로 승진한다. 1108년 둘째 딸을 예종의 비로 집어넣으면서 그는 날개를 달았고, 1122년 예종이 죽고 외손주가 왕위에 올라 인종(仁宗, 재위 1122~46)이 되자 그는 비상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작업은 그동안 그를 시기해 온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 그는 조정 대신 50여 명을 싹쓸이하고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좌에 올랐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그는 안전장치로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집어넣는다. 인종으로서는 이모들을 아내로 맞아들인 격이지만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된 이자겸에게 찍소리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이자겸이 지군국사로 자처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시기부터다.
직함이 지군국사일 뿐 그는 사실상의 왕이었다. 죽은 자기 조상들에게 작위를 수여한다든가,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 고려 왕의 생일을 가리키는 말)이라 부른다든가, 왕에게 자기 집에 와서 칙령을 내리게 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그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 즉 李씨가 왕이 된다는 설인데, 한문에서 흔히 구사하는 파자破字를 이용한 개그다)마저 믿었으니 실제로 왕이 되려는 욕심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만약 그의 의도대로 되었더라면 실제보다 3세기쯤 앞서 한반도에 ‘이씨 왕조’가 들어섰으리라(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까 관계는 없지만).
아무리 장인이자 외할아버지라 해도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이 노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때마침 1126년 이자겸의 전횡에 반대하는 대신들은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인종에게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자고 부추긴다. 인종은 즉각 동의하고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데, 말하자면 국왕이 반란을 획책하는 셈이니 왕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자겸은 국왕의 반란을 진압할 만한 물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자겸의 동업자이자 군사력을 담당한 그 인물은 바로 윤관(尹瓘)의 부관으로 9성을 개척하는 데 공을 세운 바 있는 척준경이다.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鱗), 지녹연(智祿延) 등 왕당파는 문벌 세력이 나라를 주무르는 데 반대하는 하급 무관들을 조직해서 착실히 반란을 준비한다. 이윽고 거사일을 맞아 그들은 궁성에서 봉기했는데, 태산을 울릴 듯하다가 정작으로 잡은 건 쥐꼬리뿐이다. 겨우 척준경의 동생을 살해한 성과 밖에 올리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화가 난 척준경이 군사를 일으켜 국왕의 반란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낸다. 이 과정에서 궁성마저 불타 없어졌으니 인종은 이제 권력만이 아니라 집마저 잃은 비참한 국왕이다. 자포자기로 그는 그 참에 왕위를 이자겸(李資謙)에게 넘기려 했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자겸은 일단 왕을 연금해 버린다. 기회를 봐서 왕을 독살하고 자신이 즉위한다는 게 그의 시나리오다(실제로 그는 독살을 시도했으나 자신의 딸이 조카이자 남편인 인종에게 알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꽉 막힌 사태를 푸는 열쇠는 물리력을 지닌 척준경에게 있었다. 그 점을 알아차린 최사전이라는 자가 다시 비밀리에 인종을 접촉해서 척준경을 이자겸(李資謙)에게서 떼어내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장으로선 뛰어나지만 단순무식했던 척준경, 인종이 지난 일을 잊겠다고 말하면서 다독거리니 그만 넘어가 버린다. 결국 왕의 사주를 받은 척준경이 선수를 쳐서 이자겸 일당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기묘한 반란은 끝났다.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어 곧 죽었고, 7대 80여 년에 걸쳐 고려 왕실의 외척으로 떵떵거리던 인주 이씨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척준경의 운명이다. 이자겸과 왕당파 양측에게 모두 일등공신인 척준경은 이듬해인 1127년 탄핵을 당해 유배되면서 토끼를 잡은 뒤 사냥개가 어떻게 되는지 온몸으로 체험해야 했다.
비록 쿠데타를 성공시켜서 왕정복고를 이루기는 했으나 고려 왕실의 권위는 이제 땅에 떨어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이유는 물론 왕실의 외척 세력이 지나치게 커진 탓이지만, 여기에는 단순히 고려의 내부 사정만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개국 초부터 사대의 대상이었던 한족 왕조 송나라가 힘을 잃고, 현종 이래 고려의 상국으로 군림했던 요나라가 멸망하는 일련의 국제적 격변은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고려의 권력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가 혼란 상태에 있는 한 고려의 진통은 이자겸(李資謙) 사태 하나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고려 왕실에는 곧이어 또 다시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닥친다.
▲ 여진의 실력 개국 초부터 북방의 야만족이라고 얕보았던 여진은 고려가 질척거리고 있는 동안 어느새 통일을 이루고 금 나라를 세울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물론 이자겸이 사금책을 들고 나온 것은 여진의 성장을 경계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였다. 그림은 여진 병사와 여진문자다(한자를 본떠 만든 티가 역력한데, 거란문자도 이와 비슷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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