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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동북아 국제사회(강감찬)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동북아 국제사회(강감찬)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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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아 국제사회

 

 

비록 드라마는 조기 종영되었어도 아직 미니시리즈가 다 끝난 건 아니다. 스토리가 2부작으로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출자인 요 성종은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이 인기 없는 시리즈를 끝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로서는 고려의 현종이 입조의 약속을 지켜준다면 그것으로 종결을 지으려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현종은 사신을 보내 병 때문에 출연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한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갓 배우가 감독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생각에 성종은 열받지 않을 수 없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3부를 제작할 구실은 된다. 그러나 이미 2부작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성종은 가급적이면 여기서 시리즈를 끝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출연 거부에 따른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 즉 사전에 출연료로 지급된 강동 6를 반환하라는 것이다. 물론 현종은 그럴 마음이 없다. 계약 위반이라고 생각한 성종은 3부작을 강행하기로 결심한다. 더구나 고려가 다른 연출자인 송나라 측으로 붙은 것은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든다.

 

사실 요나라의 침략에 시달린 바 있는 송나라는 계속 고려에 추파를 던져왔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 즉 고려와 연대해서 요를 제압한다는 전략으로 자신의 취약한 물리력을 보완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전통적인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중국의 한족 왕조를 위해서는 기꺼이 이적(夷狄)이라도 되겠다는 게 한반도 왕조들의 전통적인 봉사 정신(?)이니까 고려는 송이 보내는 손짓이 반갑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그런 태도가 요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면서까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몇 차례나 실패하자 드디어 1018년 말에 성종(成宗)2차전에서 개경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던 소배압(蕭排押)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내려보냈다. 1차전의 80, 2차전의 40만에 비하면 훨씬 적은 병력이다. 왜 그랬을까? 혹시 성종은 두 차례의 시리즈를 통해서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병력의 수보다 병력의 운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걸까?

 

만약 그랬다면 성종은 송나라를 무릎 꿇린 걸출한 군주답지 않게 커다란 판단미스를 범한 셈이다. 소배압은 처음부터 강동 6주를 비롯해서 고려 북부의 성곽들을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12차전에서 한반도 왕조는 과연 전통적으로 수성과 농성에 강하다는 점을 이미 절감한 바 있는 그는 대병력으로도 고려의 성들을 깨뜨리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개경으로 곧장 진격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일리가 있는 구상이긴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2차전에서 개경을 점령하는 개가를 올린 것은 그나마 대병력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거란군은 몇 차례 접전에서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개경을 향해 남진했으나 결국은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개경 인근의 신은현까지 온 그들은 개경을 점령하긴커녕 철군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데다 북쪽에서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과 강민첨(姜民瞻, ?~1021)이 이끄는 고려군이 추격해 오고 있으니 거란군은 이미 공격군의 면모를 잃고 생존을 도모하는 데 급급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할 수 없이 소배압은 남은 군대를 모아 퇴로를 뚫었다. 청천강까지는 그럭저럭 퇴각에 성공했다. 그러나 압록강을 얼마 앞둔 구주(귀주)에서 강감찬에게 덜미를 잡혀 처참하게 도륙당한다. 결국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는데, 이것이 이른바 구주대첩이라 알려진 사건이다(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전적지도 이 부근이었으니까 아마 지금이라도 이 지역을 발굴하면 1천 년이 넘은 무수한 병장기들이 나올지 모른다)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쇠가죽 주머니들을 만들어 강물을 막아두었다가 일시에 흘려 보내 적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가 책략이 풍부한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이야기일 터이다. 더구나 당시 그는 칠십 줄에 들어선 노인이었으니 대단한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그 전공으로 강감찬은 현종의 존경을 받는 것과 아울러(2차전에서 현종을 나주로 피신시킨 것도 그였다) 일약 고려의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그 덕분에 이후 전국 각지에서 강감찬에 관한 설화들이 생겨나 널리 퍼졌는데, 대표적인 설화는 그의 얼굴이 곰보인 추남이 된 것에 대한 이야기다. 원래 그는 미남이었으나 얼굴이 너무 잘 나면 장차 큰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곰보가 되었다고 한다. 요즘과는 정반대의 성형수술을 받은 셈이다.

 

 

별이 떨어진 곳 현재 서울의 관악구에 있는 강감찬 사당이다. 그가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낙성대(落星臺)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강감찬이 태어났고 그의 출생지에는 강감찬 낙성대라는 글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3층 석탑도 있었지만, 이 사당 건물은 1970년대에 지어졌다.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귀국한 소배압은 성종(成宗)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듣고 보직 해임되었으나, 실은 그 전략적 미스가 어찌 그의 탓일까? 성종은 강동 6를 공략하지 않고 지나친 게 패인이라고 탓했지만 10만의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건 소배압의 단독 판단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3부작 미니시리즈는 마무리되었다. 전란의 피해는 전장이 된 고려가 물론 더 컸지만 병력 손실이 큰 요나라도 그에 못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성종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 문제는 없던 것으로 하고 1차전이 끝날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즉 고려가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다시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성종은 1019년 두 차례에 걸쳐 화해의 제스처를 냈고, 고려는 그의 요구를 수락하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제 견적서는 나왔다. 승부 자체는 무승부지만 크게 보면 요나라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송과 고려의 사이에 위치한 거란은 동아시아 형식상의 서열에서 둘째라는 지위와 실제상의 서열에서 첫째라는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고려를 길들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삼국이 정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고려 역시 크게 잃은 것은 없다. 어차피 완전히 독자적인 노선을 취할 수는 없는 입장이므로 송을 받들든, 요를 섬기든 큰 차이는 없다(사실 이후에도 고려는 송과의 비공식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오히려 전란을 계기로 고려는 두 가지 소득을 얻었다. 한족 왕조에 대한 사대주의를 표방한 신라계 귀족들의 입김이 다소 약해지면서 진취적인 기상이 되살아난 게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거란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무역의 폭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거란의 대장경을 본받아 고려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한 것이나, 포로가 된 거란인들을 통해 요나라와의 무역이 활성화된 게 이후 고려 사회의 변모된 모습이다. 고려가 국제사회의 무대에 데뷔하는 것도 한족 왕조와 비교적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 무렵부터다알다시피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어 명칭으로 사용되는 코리아(Korea)는 바로 고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당시 요나라는 유목민족의 제국답게 극동 세계만이 아니라 멀리 서역, 즉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거란이라는 이름은 캐세이(Cathay)라는 항공사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이 거란을 키타이(Kitai)라 부른 데 기원을 두고 있다(일본어에서 기타란 을 뜻하므로 키타이는 혹시 북쪽이란 말에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고려가 송나라와의 국교만 고집했다면 아마 코리아의 기원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려는 요나라의 세계 무역로의 한 끝을 담당했으며, 거기서 자극받아 해상으로도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중국화 드라이브

외교로 넘긴 위기

전란에의 초대

동북아 국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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