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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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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고려 왕조는 왕건이 세웠으나 광종(光宗)성종(成宗)이 다듬었고 문종이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여 완성된 나라다. 국가 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 제도를 비롯하여 지방행정구역 재편, 법 체계 등 제반 국가 체제를 완비한 게 문종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나라꼴을 갖추게 되는 데는 무려 150년이나 걸린 셈이다. 어쨌든 그 결과로 그때까지의 한반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왕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정복국가의 수준에 머물렀을 뿐 행정국가는 이루지 못했던 고대 삼국,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서 존재했던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는 이제 명실상부한 왕국이 된 것이다. 또한 비록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는 처지이긴 하나 그래도 송, 요와 더불어 고려는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자격도 획득했다.

 

그러나 고려의 그런 도약이 순전히 자체의 힘만으로 가능했을까?? 만약 중국의 송나라가 당나라만큼 강력한 제국이었다면 고려가 그렇듯 독립적인 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예전의 신라처럼 중국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다면 선진 문물을 수입해서 문화적 발전을 이루는 데는 유리했을지 몰라도 대외적 위상에서는 그런 지위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그 짧은 번영기는 중국의 한족 제국인 송나라가 힘의 약세를 보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8세기 초반 신라의 번영기는 당나라가 힘의 구심점으로 역할한 데서 나온 반면 11세기 후반 고려의 번영기는 오히려 송나라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이 기묘한 불일치가 말해주는 것은 뭘까?

 

앞서 말했듯이 송나라는 중국식 제국의 완성태에 해당하는 나라다. 주나라 때 중화 이념이 생겼고, 이것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유학으로 체계화됐으며, 이어 한나라에서는 유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공인됐고, 남북조시대에는 유학에 기초한 관리 임용제도인 과거제(科擧制)와 그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경제 제도인 균전제(均田制)가 탄생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제도화에만 성공했을 뿐 귀족 체제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데 비해 송나라는 그때까지의 모든 발전을 집대성해 유사 이래 처음으로 가장 완벽한 유교 제국을 이룬다. 그 결과물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더불어 관료들이 황제를 보좌하는 사대부 체제로 요약된다이렇듯 이념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이념을 실현하는 제국이 형성된 중국에 비해 유럽의 경우는 정반대의 역사 발전을 거친다. 유럽에서는 중국에서 중화 이념이 생겨난 시기보다 1천 년 이상이나 늦게 통일을 위한 이념(그리스도교)이 생겨났으며, 다시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이념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공인했다(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념에 관한 한 동양은 서양보다 크게 앞서는 셈이지만, 이는 동양의 역사가 처음부터 인위적인 경로를 걸어왔다는 뜻이 된다. 통일적 이념이 부재했기에 자연스럽게 분권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서양과는 달리 동양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통일을 겨냥한 이념을 가지고 시작함으로써 이후 내내 부자연스러운 정치적 통일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을 정복하고 흡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가 열심히 본받으려 한 것도 바로 그런 체제였다.

 

그 자체로만 보면 그것도 나쁘다고 할 것은 없다. 사실 유교적 국가 체제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에 대단히 유리하고 편리하다. 북극성[천자] 주변을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제후들]가 하루에 한 바퀴 씩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그런 우주적 조화를 인간 세상에 옮겨다 놓은 것이 바로 유교적 질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다만 문제는 우물 안의 개구리만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바깥이 없다면 유교적 질서는 더없이 훌륭하다. 다시 말해 중국과 중국을 받드는 오랑캐들로 이루어진 세계인 중화세계만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그 아름다운 질서는 영구히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중화세계는 송나라와 고려로만 이루어진 좁은 세계였으니 그 질서의 매력도 애초부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 올랐으면 내려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중국식 제국의 완성태인 송나라는 정상에 오른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일찌감치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요나라에게 치욕을 당한 것은 그 예고편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예정보다 훨씬 이르게 제국의 문을 닫을 뻔했던 송나라가 명패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행히도 이후 요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현종이 죽은 해(1031)에 요의 성종이 죽으면서 요나라는 더 이상의 대외적 팽창을 포기하고 그간에 얻은 성과를 토대로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데, 그 덕분에 송과 고려에 대한 북방의 압력은 한층 느슨해졌다(그러나 요나라는 번영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곧 쇠퇴한다). 이 공백을 이용해서 고려도 짧은 번영기를 맞았고 서둘러 체제 정비에 나설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 고려보다 더 다급한 처지에 놓인 것은 송나라였다. 고려는 그나마 영토 확장이라는 실익이라도 얻었지만 송나라는 오랑캐에게 수도를 짓밟히는 치욕을 당한 데다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했다. 지금 송나라에게 필요한 것은 고려처럼 체제 정비의 수준이 아니라 전면 개혁이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이다.

 

조공으로 인한 재정난은 부국책으로 막고, 부족한 군사력은 강병책으로 키운다. 이름하여 부국강병책이다. 이를 위해 왕안석(王安石)은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청묘법, 물가 안정을 위한 균수법, 토지 조사를 위한 방전균세법 등의 부국책과, 병농일치를 꾀하는 보갑법과 보마법 등의 강병책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데, 이런 급진적인 정책에 반발이 없을 리 없다. 특히 지주들과 더불어 송대에 크게 성장한 대상인 세력은 왕안석의 조치에 반대하는 기존의 정치권과 결탁해서 거세게 저항한다. 개혁파(신법당)에 맞서서 보수파(구법당)를 이룬 그들의 주장은 정치란 사대부들을 위한 것이지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지금의 가치관으로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입장이었다).

 

왕안석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황제 신종이 죽자 그 갈등은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정쟁으로 발달한다. 이것이 송대에 극성을 떨치게 되는 당쟁의 시작이었으니, 개혁의 부작용치고는 심각하다 하겠다사실 당쟁은 당나라 때도 심했고, 그 생리상 어느 시대든 있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송대에 당쟁이 특히 치열한 데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제(科擧制) 때문이다. 과거제는 전통적인 귀족 집단의 혈연대신 학연(學線)’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만들어냈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자는 자신을 길러준 스승보다 뽑아준 과거 시험의 감독관을 존경했고, 합격 동기와 선ㆍ후배 등을 통해 부지런히 연고를 맺었다. 관료의 임용이나 승진에는 고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이 과정도 연줄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왕안석의 신법이 출현했으니 당쟁으로 이어진 것도 당연하다. 당시 고려에서는 물론 그런 개혁도 없었지만, 아직 과거제가 자리잡지 못한 탓으로 분명한 당파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경우 당쟁의 시대는 조선으로 넘겨진다. 이렇게 해서 야기된 당쟁은 결국 유학의 근본 이념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주희(朱熹, 1130~1200)의 성리학을 낳게 된다.

 

 

중화의 두 영웅 송나라는 가장 완벽한 유교제국이었지만 동시에 유교제국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위기에 처한 중화세계를 구하기 위해 두 명의 영웅이 등장했는데, 위쪽은 11세기에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도모한 왕안석(王安石)이고, 아래쪽은 그게 실패하자 12세기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한 주희(朱熹)(주희의 아버지는 왕안석의 팬이었다고 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전성기 코리아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북방의 새 주인

국왕의 쿠데타

북벌의 망상

삼국사기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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