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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삼국사기』 미스터리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3장 안정의 대가, 『삼국사기』 미스터리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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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미스터리

 

 

묘청(妙淸)이 자랑스런 독립당이 아니라 위장된 사대당이었다는 사실은 신채호 같은 민족사학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 사대주의의 핵심 인물은 물론 묘청이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이다.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부식은 그야말로 팔자가 늘어졌다. 이자겸(李資謙)의 몰락으로 외척 세력이 제거되었고, 묘청(妙淸)의 몰락으로 서경의 라이벌이 뿌리 뽑히면서 이제 세상은 개경 귀족들의 것이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김부식은 정지상(鄭知常)이라는 학문적 라이벌이자 최대의 정적도 제거했고 반란 진압의 공로로 최고위직인 문하시중 자리까지 따냈다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정지상(鄭知常)을 즉각 살해한 데서도 보듯이 김부식(金富軾)점잖은 유학자답지 않게 정적을 제거하는 데도 능한 인물이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할 당시 자신의 부관이었던 윤언이(尹彦頤, ?~1149)를 제거한 것에서도 그의 교활함을 볼 수 있다. 윤관(尹瓘)의 아들인 윤언이는 평소에 자기 아버지가 쓴 의천의 비문을 김부식이 마음대로 뜯어고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인종 앞에서 주역을 놓고 벌인 논쟁에서 김부식을 능가하는 논리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랬으니 김부식에게 미운 털이 박힌 건 당연한 일,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그가 정지상과 내통했다고 몰아붙여 지방 관직으로 몰아냈다. 고려와 조선 양대에 걸쳐 권문세가를 이룬 파평 윤씨가 경주 김씨에 밀려 잠시 수난을 겪은 시기다. 당대의 그는 시중으로서 더 이름을 떨쳤겠지만, 후대에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1145년 인종의 명을 받아 10명의 학자들을 거느리고 편찬한 삼국사기라는 역사서다.

 

알다시피 삼국사기는 고대 삼국에 관한 정사(正史)로서는 유일한 책이다. 그런 만큼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유교적 세계관과 사대주의 사관(史觀)에 바탕을 둔 탓으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도 어지간히 받았다. 그 비판의 논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사대주의적 색채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은 데 비해 오늘날에는 지나치다는 게 정설인 걸 보면 당대의 평가와 역사적 평가는 아무래도 다르게 마련인 모양이다. 어쨌든 사관을 둘러싼 평가에 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 새로울 게 없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삼국사기의 편찬 과정에 관련된 두 가지 미스터리다.

 

첫째는 삼국사기의 편찬 시기다. 왜 하필 삼국이 멸망한 지 무려 500년이 지났고 통일신라가 멸망한 지도 2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삼국에 관한 역사서가 편찬된 걸까?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경우 새 왕조가 들어서면 50~100년 이내에 전 왕조에 관한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다. 그런 중국적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을 고려 왕실에서 삼국사기를 그렇듯 뒤늦게 편찬하게 된 이유는 뭘까? 나라의 기틀을 만드느라 바빴던 탓일까? 그러나 그렇게 바쁜 중에도 새 왕이 즉위했을 때 전 왕의 치세에 관한 실록은 꼬박꼬박 챙겼을뿐더러 현종 때에는 태조에서부터 목종까지 일곱 왕의 치세를 정리한 7대실록(七代實錄)까지 편찬했던 것을 보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정확한 사유는 기록에 전하지 않지만 가능한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수백 년이나 늦어진 이유는 일찍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다음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앞서 보았듯이 당시 신라는 중국의 군현이라는 처지였으므로 멸망한 두 나라의 역사를 정리할 권리도, 의지도 없었다. 초기의 고려 역시 중국을 섬기는 입장이었으니 삼국의 역사를 정리할 권리도 의지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건국한 지 200년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삼국의 역사서를 편찬할 마음을 먹게 된 이유도 분명해진다. 우선 중국의 송나라가 멸망했으니 이제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더구나 중국의 중심인 중원을 오랑캐인 금나라가 차지하면서 고려 정부에게는 이제부터 모든 일을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전까지 몰랐던 삼국에 관한 역사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인종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압력을 가한 인물이 당시 금의 황제인 희종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금의 입장에서도 고려가 송에 대한 사대관계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게 유리했을 테니까). 하권에서 보겠지만 17세기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뒤 조선에서 실학이 발달하게 되는 배경과 마찬가지다.

 

둘째 미스터리는 삼국사기의 편찬에 사용된 사료(史料)들이다. 소설을 쓰려 한 게 아니라면 당연히 편찬자들은 당대의 사료들을 참고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의 건국 시기는 김부식(金富軾)에게도 무려 1천년 이상의 까마득한 옛날이었으니 사료가 없다면 편찬할 엄두도 낼 수 없다. 당시 그는 가장 주요한 사료로서 중국 측 사서들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서만으로 삼국의 역사를 구성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의 역대 제국들은 예외없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주변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중국의 변방으로서만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 변방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그런 중화적 관점의 역사 서술 방식에도 이름이 있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부른다. 춘추공자(孔子)가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데, 객관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서가 아니라 공자가 유교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비판한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비롯되어 이후의 중국 역사서들은 대부분 공자의 서술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이 다른 오랑캐나라들과 맺은 외교 관계를 모두 중국에 조공했다고 기록하는 게 그런 예다. 춘추필법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도 유교적 대의명분이므로, 중화세계에 치욕적인 사실들은 마음대로 왜곡하고 변경해서 서술하는 게 허용되며, 오히려 그게 올바른 역사 서술 방식이라고 권장될 정도였다. 따라서 중국 측 사서만 참고서로 이용했다면, ‘대무신왕(大武神王) 412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부여를 쳤다든가 고이왕(古爾王) 310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사슴 40마리를 잡았다는 식의 상세한 연대적 기록이나, 삼국의 인물들을 다룬 열전(列傳) 부분은 도저히 서술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데는 중국 측 사서보다도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기록들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의 곳곳에서 해동고기(海東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신라고서(新羅古書)등의 옛 기록[古記]에서 인용한 부분을 싣고 있다. 하지만 삼국의 왕계에 관해 연도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물론 앞서 2세기에 관한 기록에서 보았듯이 연도가 틀린 경우도 많지만), 그는 아마 그런 고기들 이외에도 삼국에 관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역사서들도 참조했을 가능성이 짙다(아마 그것들은 삼국이 직접 편찬한 고구려의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 같은 문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록들이 모두 후대에는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를 편찬한 뒤 그 기록들은 얼마 안 가서 폐기처분되어 버린 듯하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하고 나서 그 옛 기록들을 공식적으로 없애 버린 것은 아닐까? 김부식에게 혐의를 두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범인은 조선왕조로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가 간행된 뒤에도 일부 기록들은 남아 있었고,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일연 같은 고려 말의 문인들은 그것들을 참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개국 초에 옛 기록들에 대한 대대적인 폐기 작업이 실행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만약 그런 역사적 범행 이 실제로 있었다면 두 용의자(김부식과 조선 왕조) 모두 동기는 똑같다. 유교적 사관과 사대주의 성향에서는 한반도의 독자적인 역사서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테니까.

 

 

라이벌 역사서 유교사관과 사대주의, 신라중심주의로 왜곡된 역사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정사(正史)? 삼국사기의 이 두 가지 측면 중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언론인이자 민족사학자인 신채호는 첫 번째 측면에 관해 통렬하게 공박했다. 신채호가 연재를 시작한 조선사. 신채호의 글은 해방 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전성기 코리아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북방의 새 주인

국왕의 쿠데타

북벌의 망상

삼국사기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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