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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무모한 항쟁(팔만대장경, 최항, 최의, 쌍성총관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무모한 항쟁(팔만대장경, 최항, 최의, 쌍성총관부)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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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모한 항쟁

 

 

설사 강화도 천도가 항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국토와 백성을 버리고 싸우자는 격이니 그건 항쟁이라 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항복은 굴욕적인 것이지만 일단 항복을 했으면 자신의 처지와 역할에 충실해야만 실익이라도 거둘 수 있다. 치욕을 씻고 복수를 꾀하는 것은 그 다음의 수순이다그런 점에서 강화도 천도를 반대한 참지정사 유승단(兪升日, 1168~1232)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는 몽골에 사대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현실에서는 단연 그게 더 현명한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도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고집하는 게 기백 있는 태도인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유승단은 강화도로 천도하면 변방의 백성들은 다 죽고 노약자는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비록 개경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 하더라도 백번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항복을 해놓고 나서 항쟁을 하겠다는 고려의 의도는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고려 정부에게는 과연 일관된 정책과 노선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몽골의 눈에 그런 비상식적인 처사가 거슬리지 않을 리 없다. 천도 두 달 뒤인 12329월에 벌써 살리타는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강화도 망명정권이 그에 응할 리 없으니 전쟁이 재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살리타는 이 기회에 아예 고려의 혼줄을 빼놓을 작정을 한다. 그래서 강화도를 공격하는 대신 분풀이 삼아서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기로 마음먹는다. 지난번에는 충청도까지만 왔던 몽골군이 경상도까지 내려온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살리타 개인에게는 불행한 선택이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승려 김윤후(金允候)가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살리타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 고려는 대구 부근의 부인사에 간직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는 참극을 당했으니 적 사령관의 한 목숨과 맞바꾼 것치고는 혹독한 대가라 하겠다살리타가 죽자 고려인 중 가장 크게 걱정한 사람은 홍복원(洪福源, 1206~58)이라는 자였다. 그는 살리타의 1차 침략 때 아버지와 함께 몽골에 투항한 이후 내내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협력한 인물이다. 1차전의 결과로 몽골이 관장하게 된 북부 40개 성을 지휘하면서 그는 2차전에서도 몽골의 가이드 노릇을 했는데, 몽골군이 철수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몽골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몽골이 고려를 침략할 때마다 매번 참전했으며, 후손들까지도 랴오둥과 만주를 본거지로 삼고 고려 왕조와 대립했다. 오늘날로 치면 매국노인 셈인데,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와 같은 친원파들 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비상식적이고 무모한 항쟁을 선택한 결과로 고려가 겪어야 할 참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당시 몽골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중국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고려에 대한 응징이 유보되었을 뿐이다. 과연 1234년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뒤 이듬해에 몽골은 다시 고려를 침략하는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일체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파상공세를 취한다(아마도 2차 정복의 드라이브를 건 오고타이의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간도 전보다 훨씬 긴 5년간이었으니 고려로서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국난이 아닐 수 없다.

 

 

관을 대신한 민 그렇잖아도 무능한 데다 강화도로 도망쳐버린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한 것은 고려 백성들이다. 처인성 전투에서는 부곡민들이 오히려 대몽 항쟁에 앞장섰으며, 승려 김윤후는 고려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적장 살리타를 활로 쏘아 죽이는 쾌거를 올렸다. 이렇게 전란을 맞아 정부가 도망치고 백성이 싸우는 현상은 나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조선 말 의병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사진은 처인성 터다.

 

 

비록 각지에서 군민이 합세한 고려 측의 저항을 받았으나 속도만 가끔 느려졌을 뿐 몽골군은 거침없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한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물론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는 곳 중에는 그들의 말발굽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같은 시기에 바투의 유럽 원정군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도시들을 짓밟고 있었으니 가히 몽골군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구세계의 전체를 초토화시킨 시기라 할 만하다. 문화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3차전으로 고려는 한 가지 문화재를 만들었고 다른 한 가지 문화재를 잃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서 새로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한 게 전자라면(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최대의 사찰인 경주 황룡사가 불타 무너진 것은 후자다. 그러나 황룡사와 더불어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던 9층탑과 대종, 장육상이 녹아 없어진 것을 팔만대장경이 생긴 것으로 만회할 수 있을까?

 

이 지경이 되자 그동안 나몰라라 하고 버티던 강화도 정부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238년 말에 고종은 사신을 보내 다시 항복의 의사를 밝혔고, 이에 대해 몽골 측은 국왕이 직접 입조할 것과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삼아 철군했다. 문제는 고려 정부가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는 데 급급할 뿐 여전히 항복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화장실에 가기 전과 나온 뒤의 심정은 다르다지만, 수백만 백성들의 운명을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고려 정부의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족 왕조에 대해서는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사대해 왔으면서도 북방 이민족 왕조에 대해서는 막무가내로 버티는 건 대체 무슨 오기일까?

 

몽골의 응징이 곧이어 뒤따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몽골 내부의 문제 때문이었다. 1241오고타이가 죽자 몽골제국의 중앙정부에서는 제위 계승권을 놓고 혼란과 내분이 빚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246년 구유크(Guyuk, 貴由)가 제위를 계승한 뒤 바로 이듬해에 다시 고려 침략이 행해지지만 곧 구유크가 죽어 철군하는 바람에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전란도 종결되지 않는다. 몽골 황실에게도 이제 강화도에서 20년이나 버티고 있는 고려 정부는 제법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1251년에 즉위한 몽케(Mongke, 蒙哥, 재위 1251~59)는 다시 고종의 입조와 개경 환도를 요구했는데, 최우(崔瑀)를 계승한 아들 최항(崔沆, ?~1257)은 아버지의 쇠고집을 물려받은 데다 사기꾼의 기질까지 농후한 인물이었다. 몽골에 사신을 보내 왕을 강화도에서 내보내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판에 살짝 다른 왕족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 명백한 사기극에 몽케는 당연히 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위기와 정권의 위기를 혼동하고 있는 최항은 1253년에 몽골군이 침략해 오자 또 다시 사기극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강화도 맞은 편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고종이 마치 뭍으로 나온 것처럼 꾸며 거기서 몽골 사신을 영접하도록 한 것이다.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온 것은 그게 처음이긴 했으나 같은 사기에 두 번 속을 바보는 없다. 결국 이듬해 여름부터 시작된 몽골의 6차 침략은 사상 최대의 피해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해에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성은 무려 206800여 명이고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지방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고 되어 있으니 사기의 대가는 엄청나다.

 

국제 사기극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음에도 이를 뉘우치기는 커녕 자신의 집권에만 여념이 없었던 데다 강화도에서도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던 최항이 병으로 편안하게(?) 죽은 것은, 신이 없거나 아니면 신의 업무 중에 권선징악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최항의 서자로 뒤를 이은 최의(崔竩, ?~1258)에게는 그런 은총이 베풀어지지 못했다. 노비를 어머니로 둔 탓인지 일찍이 신분해방에 눈을 뜬 그는 선비보다 노비를 측근에 두고 중용했으며, 아직 몽골의 전란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권력의 맛을 즐기는 데만 관심을 보였다. 따라서 적이 많을 것은 당연한 일, 1258년 김준(金俊, ?~1268)과 유경(柳璥, 1211~89)이라는 자들이 최의의 집을 습격해서 그를 암살함으로써 60년에 걸친 최씨 정권은 끝났다. 김준은 무신이고 유경은 문신이므로 시대가 시대인 만큼 권력상 서열은 김준이 위다. 그래서 아직 무신정권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으나 최씨 고집이 무너졌으므로 어처구니없는 대몽 항쟁이 더 이상 지속될 이유가 없다. 이듬해 고종이 몽골과의 타협으로 태자를 대신 입조시키면서 28년에 걸친 무모한 항쟁은 최종적으로 끝난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고려는 전란의 피해를 입기 전에 진작부터 몽골에 대해 확실한 사대관계를 취해야 했을 것이다. 결과론일까? 그러나 처음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으니 결과론은 아니다. 권력 수호 차원에서 무모하게 버틴 무신정권과 뿌리깊은 중화 사상으로 오랑캐에 대한 항복에 망설였던 개경 귀족들이 합작으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급기야는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더욱이 항복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영토에서 나타난다. 1258년 동북부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이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그것을 빌미로 화주(和州,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해 함경도 땅을 고려에게서 빼앗았다. 1269년에는 서경의 반란 세력이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고 평안도 땅을 차지했다. 서경을 중시하라는 왕건의 유시는 애시당초 포기한 터였지만, 초기부터 내내 관리에 애를 먹던 북부의 영토를 떼어준 것에 아마도 왕과 개경 귀족들은 시원섭섭해하지 않았을까?

 

 

잃은 보물과 얻은 보물 몽골 침략으로 고려는 신라시대의 거찰인 황룡사를 잃었고 팔만대장경을 얻었다. 사진은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각이다. 보물 하나를 잃고 다른 보물 하나를 만든 셈인데, 불교도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황룡사와 대장경을 맞바꾼 것은 밑지는 장사라 하겠다. 더구나 전란의 와중에서 불력으로 외적의 침략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대장경을 주조한 것은 아무리 13세기의 발상이라 해도 순진(?)하다기보다 어이가 없을 정도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다시 부는 북풍

무모한 항쟁

반군과 용병

황제의 사위들

식민지적 발전

식민지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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