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
Alienation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봉건적 신분질서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부도덕한 체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조선시대 양반집에서 부림을 당하던 머슴이나 관청의 관노는 과연 자신의 처지를 불우하게 여기고 신분질서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을까? 고려 말 노비의 난을 주도한 만적(萬積)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王侯將相, 寧有種乎]”고 말했지만, 그것은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이 지배하는 하극상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나면서부터 신분과 사회적 역할이 정해진 과거 사회에는 오히려 소외가 없었다. 소외는 근대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질서정연하고 명백한 사회 체제 안에서 정해진 위치를 가졌던 중세의 봉건 체제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는 개인을 전적으로 자기의 발로 서도록 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한 개인을 다른 개인들로부터 고립시키고 분리시켰다.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외란 사회적 역할로부터 실제로 분리되거나 분리되었다고 느낄 때 생겨난다. 실제로 분리되었을 때는 주로 경제적 소외가 되며, 분리되었다고 느낄 때는 심리적 소외가 된다.
경제적 소외는 노동 과정에서 비롯된다. 과거 사회에서는 사회적 역할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동을 명령하는 사람이나 노동을 강요당하는 사람이나 그 메커니즘을 당연시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는 아무리 가혹한 노동이라 해도 불만과 반란은 일어날지언정 소외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분제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라지고 사회적 역할이 가변적인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일방적인 노동 과정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가 계약을 통해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생활을 유지하는 체제다. 노동자는 현실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살아갈 수 있지만 노동력을 팔 것이냐 말 것이냐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이며 선택이다. 따라서 노동력을 주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당연시했던 과거의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고용 계약을 맺는다. 여기에 노동 소외의 뿌리가 있다.
노동은 언어와 더불어 인간의 주요한 특성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생물학적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아실현이라는 삶의 가치도 노동에서 얻는다. 그래서 노동은 본래 자발적이고 창의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는 강제적인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어느 시대에나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강제적이었으나 자본주의 시대에는 이념상으로는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노동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노동자에게는 그런 노동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념과 현실의 괴리가 소외로 나타난다.
노동 소외의 또 다른 측면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 내재해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과정을 통제할 권리를 전혀 갖지 못하며, 노동의 생산물도 자본가에게 내주어야 한다. 법적으로 노동자는 자유로운 신분이지만 생산 과정에서는 사실상 노예나 농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다.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고, 강요된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의 생산물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가 겪는 경제적 소외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자만 소외를 느끼는 게 아니다. 경제적 소외는 노동자가 가장 크게 느끼지만 심리적 소외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경험한다. 현대 사회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해체되고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반면에 새롭고 긍정적인 가치관은 아직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다. 향촌 사회는 변질되었고 도시는 개인주의가 지배하면서도 개성을 잃은 익명의 대중으로 가득하다(→ 고독한 군중).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은 가치관의 혼란과 규범의 상실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심리적 소외로 나타난다. 사회 조직이 합리화라는 미명 아래 형식주의로 흐르고 비인간적인 관료제가 사회 전반에 관철되는 현상은 심리적 소외를 더욱 부추긴다.
경제적 소외는 물론이고 심리적 소외도 단순히 정서적인 측면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의 소외는 사회의 메커니즘과 조직 원리 자체에 내재해 있으므로 구조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한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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