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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무모한 항쟁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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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무모한 항쟁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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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항쟁

 

 

비록 각지에서 군민이 합세한 고려 측의 저항을 받았으나 속도만 가끔 느려졌을 뿐 몽골군은 거침없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한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물론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는 곳 중에는 그들의 말발굽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같은 시기에 바투의 유럽 원정군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도시들을 짓밟고 있었으니 가히 몽골군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구세계의 전체를 초토화시킨 시기라 할 만하다. 문화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3차전으로 고려는 한 가지 문화재를 만들었고 다른 한 가지 문화재를 잃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대신해서 새로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한 게 전자라면(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최대의 사찰인 경주 황룡사가 불타 무너진 것은 후자다. 그러나 황룡사와 더불어 동양 최대의 목탑이었던 9층탑과 대종, 장육상이 녹아 없어진 것을 팔만대장경이 생긴 것으로 만회할 수 있을까?

 

이 지경이 되자 그동안 나몰라라 하고 버티던 강화도 정부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238년 말에 고종은 사신을 보내 다시 항복의 의사를 밝혔고, 이에 대해 몽골 측은 국왕이 직접 입조할 것과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삼아 철군했다. 문제는 고려 정부가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는 데 급급할 뿐 여전히 항복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화장실에 가기 전과 나온 뒤의 심정은 다르다지만, 수백만 백성들의 운명을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고려 정부의 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족 왕조에 대해서는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사대해 왔으면서도 북방 이민족 왕조에 대해서는 막무가내로 버티는 건 대체 무슨 오기일까?

 

몽골의 응징이 곧이어 뒤따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몽골 내부의 문제 때문이었다. 1241년 오고타이가 죽자 몽골제국의 중앙정부에서는 제위 계승권을 놓고 혼란과 내분이 빚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246년 구유크(Guyuk, 貴由)가 제위를 계승한 뒤 바로 이듬해에 다시 고려 침략이 행해지지만 곧 구유크가 죽어 철군하는 바람에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전란도 종결되지 않는다. 몽골 황실에게도 이제 강화도에서 20년이나 버티고 있는 고려 정부는 제법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1251년에 즉위한 몽케(Mongke, 蒙哥, 재위 1251 ~ 59)는 다시 고종의 입조와 개경 환도를 요구했는데, 최우(崔瑀)를 계승한 아들 최항(崔沆, ? ~ 1257)은 아버지의 쇠고집을 물려받은 데다 사기꾼의 기질까지 농후한 인물이었다. 몽골에 사신을 보내 왕을 강화도에서 내보내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판에 살짝 다른 왕족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사진출처 - 우리역사넷

 

잃은 보물과 얻은 보물 몽골 침략으로 고려는 신라시대의 거찰인 황룡사를 잃었고 팔만대장경을 얻었다. 사진은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의 장경각이다. 보물 하나를 잃고 다른 보물 하나를 만든 셈인데, 불교도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황룡사와 대장경을 맞바꾼 것은 밑지는 장사라 하겠다. 더구나 전란의 와중에서 불력으로 외적의 침략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대장경을 주조한 것은 아무리 13세기의 발상이라 해도 순진(?)하다기보다 어이가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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