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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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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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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그러나 단지 기득권층을 제압하는 게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개혁이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사회의 새로운 주도층을 만들어내야 한다. 신돈(辛旽)이 낙점한 그 신진 세력은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1367년 그는 성균관(成均館)을 새로 짓고(성균관은 충렬왕 때 처음 설치되었으나 당시에는 기존의 학교들을 모아 성균관이라 이름지은 정도였다) 공자천하의 스승이라 칭하면서 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한다. 그들이 바로 신흥 학문인 주자학을 숭상하는 유학자들, 즉 신진사대부들이다(공식적으로는 그들을 신진사류新進士類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조선과의 연관성을 기해 사대부로 통일하기로 하자).

 

승려의 신분으로 유학을 공식 이념으로 채택했다는 것은 독자적 세력이 없는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그가 개혁의 리더로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으니 신돈의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장점은 오히려 그의 몰락과 개혁의 실패를 부르게 된다. 우선 권문세족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신돈의 개혁 드라이브가 급진적으로 흐르자 권세가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를 천거했던 김원명까지 그들에게 합류했다. 그래도 새로운 개혁 세력이 튼튼했다면 아마 그들의 반동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학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주자학을 전공한 신진 사대부들이 승려인 그를 100퍼센트 충심으로 대했을 리는 없다. 1367신돈(辛旽)이 처첩을 거느리고 아이까지 낳자 오히려 그들은 신돈의 사생활을 집중적으로 성토하고 나선다.

 

원래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참신한 독자 노선이 무기였던 신돈은 급속히 방향 감각을 잃었다. 권문세족의 집요한 저항에 대해 그는 서경 천도를 계획한다거나 충숙왕 때 이미 폐지된 사심관(事審官)을 부활시켜 맞불을 놓으려 했으나 그것은 개혁을 주창한 그가 먼저 복고를 부르짖는 격이다. 결국 그 대응책들이 실패하면서 신돈은 최대의 지지자인 공민왕(恭愍王)의 신임마저 잃고 만다. 1371년 그는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으며, 그것으로 공민왕의 개혁, 아울러 고려 최후의 몸부림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이제 고려는 몰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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