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②
그 기세에 공민왕(恭愍王)은 잠시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1356년에는 2차 개혁에 나섰다. 원 황실과 혼맥을 구축하고 세도를 부리던 골수 친원파 기철(奇轍, ? ~ 1356)이 반란을 꾀한 것은 오히려 공민왕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다. 기씨 집안을 처단한 것을 기화로 공민왕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최종적으로 폐지하고, 100년간이나 존속하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제거하는 한편, 원나라식 관제를 고려의 옛 관제로 되돌리고 원나라의 연호마저 폐지함으로써 개혁의 성격이 반원에 있음을 천명한다(첨의부도 다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는 데 그쳤다. 권세가들의 저항도 저항이려니와 개혁의 주도 세력이 왕실 외척인 탓으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는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략해 오는 바람에 개혁의 환경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략이 다소 가라앉은 뒤 곧바로 3차 개혁을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신분상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는 개혁 주체를 기용한다. 그는 바로 노비를 어머니로 둔 신돈(辛旽, ? ~ 1371)이라는 승려였다.
기철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측근 무신 김원명(金元命, ? ~ 1370)의 추천으로 신돈을 알게 된 공민왕은 마침내 개혁의 리더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밝힌 신돈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도(道)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니 큰일을 맡길 만하다.” 바꿔 말하면 노비 출신의 승려라는 신돈(辛旽)의 보잘것없는 신분을 오히려 후하게 평가한 셈인데, 신분이라는 요소로써 중용을 결정할 만큼 당시 공민왕(恭愍王)의 처지가 절박했음을 말해준다. 하기는, 권문세족들이 득시글거리는 데다 홍건적의 침략으로 신흥 무장 세력마저 발흥하고 있는 고려의 상황에서 개혁을 추진하려면 믿고 의지할 사람은 신돈 같은 신분밖에 없었을 것이다【1365년 공민왕(恭愍王)은 사랑하던 아내인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져 신돈에게 개혁을 맡겼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이미 두 차례의 개혁에서 공민왕의 성향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신임은 대단히 두터웠던 모양이다. 신돈(辛旽)은 중국에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관료들에게는 영공(令公)이라 불리면서 행차할 때는 국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으로 불교계에서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당대에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보우(普愚, 1301 ~ 82)는 그를 ‘요사스런 승려’라고 혹평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아마 신돈은 공민왕이 말한 것처럼 ‘친당’이 없는 독자적인 인물이었던 듯하다】.
과연 1365년 신돈은 임용되자마자 인사권을 장악하고 권력의 기반을 다진 다음 곧바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는데, 타깃은 단연 권문세족이다. 우선 권문세족의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국정의 모든 결정권을 궁궐 안으로 가져온다. 이것으로 권세가들은 일단 정치적 영향력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다음 개혁 조치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서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1차 개혁에서도 시도된 조치였지만 이번에는 신돈 자신이 판사로 참여해서 직접 토지 심사를 맡았으니 그 강도는 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찬탈한 토지는 속속 농민들에게 반환되었으며, 그 덕분에 신돈(辛旽)은 백성들에게서 “성인이 나타났다”는 칭송까지 들었다.
▲ 난세의 문화군주 몽골이 패망할 조짐을 알아챈 공민왕(恭愍王)은 즉각 고려사회의 대대적인 수술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공민왕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갖춘 데다 「천산대렵도」라는 작품까지 그렸을 만큼 문화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런 군주가 암살된 것은 늘 개혁이 좌절되고 인물이 제거되는 우리 역사의 고질적인 병폐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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