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②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자칫 호족들이 왕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종의 안전장치가 필요해지는데, 일단 그가 생각한 장치는 신라의 상수리제도를 모방한 기인(其人)제도다. 그러나 지방 관리가 아닌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볼모 삼아 억류하는 것이므로 상수리보다는 강력하지만, 그것으로 호족 세력을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더 안전한 통제 메커니즘이 필요한데, 여기서 왕건은 아주 대단히 효과적인 방안을 구상해낸다. 혈연보다 더 강력한 안전판이 또 있을까? 호족들과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면 된다. 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릴 수 있고 국왕은 호족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 덕분에 왕건은 고려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를 거느린 국왕이 된다(조선시대의 왕들은 더 많은 처첩들을 거느리지만 그때는 후궁이 제도화되어 있으므로 논외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도 무려 스물아홉 명(왕후 여섯, 부인 스물셋)인데, 거의 대부분이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결과였으니 그야말로 육탄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왕건은 정주(개성 부근), 나주, 충주, 황주 등 신라 지역을 제외한 전국 요처를 지배하는 호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신라를 접수한 뒤에는 경순왕(敬順王)의 사촌누이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이 지역에도 튼튼한 혈연의 뿌리를 내렸다. 또한 경순왕에게는 사심관(事審官)이라는 직책을 내려 경주 지역을 관장하게 하는데, 이렇게 지역의 우두머리를 중앙에서 임명하는 제도는 나중에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마땅히 시집보낼 딸이 없는 호족 가문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집안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걱정할 건 없다. 어쨌거나 가족으로 만들면 되니까. 왕건은 통혼으로 직접 연결할 수 없는 호족 가문(주로 세력이 작은 호족)에게는 자신의 성인 왕씨를 하사해서 어거지로라도 친족관계로 만들었다【통혼도 그렇지만 사성(賜姓, 성씨를 하사함)도 왕건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니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은 군국제(郡國制)를 전국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인 유(劉)씨를 지방 수장들에게 하사했다(심지어 그는 오랑캐인 흉노의 족장들에게도 유씨 성을 내렸다).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光武帝)나 촉한을 세운 유비도 한나라 초기에 유씨를 남발한 덕분에 황실의 성을 가지게 되었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그런데 유방 역시 사성의 원조는 아니다. 진짜 원조는 주나라 시대의 종법제도(宗法制度)다. 주나라는 지배집단을 대종(본가)과 소종(분가)으로 나누어 끈끈한 혈연관계로 체제를 유지했는데, 이것을 종법봉건제라고 부른다. 이것에서도 역시 주나라가 중국인들의 영원한 고향이자 모든 동양식 질서의 근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모든 조치들이 왕건 본인에게는 확실한 안전 장치로 작용했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왕이 아닌 신분이라면, 즉 새 왕조의 건국자라면 누구나 건국 초기에는 왕권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새 왕조를 건국하기 전에는 전 왕조의 신하(혹은 전 왕조의 반란자)라는 신분이었다가 일약 일국의 왕으로 고속 상승하는 셈이므로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비록 왕건은 부하들의 추대를 받았고 신민들의 지지를 얻었다지만, 지방 호족들이 왕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오로지 충정의 마음만 가득 담겨 있지는 않다. 그래도 왕건은 건국자였으므로 비교적 권위와 카리스마가 인정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건국의 당사자가 아닌 그의 아들들에게도 그런 권위가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물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그의 아들은 알려진 자들만 해도 무려 스물다섯 명이다. 이 왕자들이 고려 왕조의 첫 번째 진통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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