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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수구와 진보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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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수구와 진보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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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와 진보

 

 

그러나 이인임(李仁任) 일파의 시대착오적인 자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명나라가 아니라 고려 내의 신진사대부다. 그 대변인 격인 정몽주(鄭夢周, 1337 ~ 92)이색(李穡)의 제자로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정도전(鄭道傳, 1337 ~ 98)은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가면서도 친명(親明)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바야흐로 고려 내 권력구도는 본격적으로 수구 대 진보의 전선으로 나뉘었다(친명 노선을 진보적이라 부르기는 좀 곤란하지만 수구파와 대립되는 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멤버로 볼 때 그 전선은 권문세족 대 신진사대부이며, 외교적으로는 친원 대 친명, 종교적으로는 불교 대 유교의 대립이다.

 

왕권이 사실상 실종된 상황에서 두 세력이 다툼을 벌인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물리력일 것이다. 그 점에서 수구 세력은 훨씬 앞선다. 홍건적 토벌로 전국민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다 시중의 자리에까지 오른 최영(崔瑩, 1316 ~ 88)이 바로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변수가 될 만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최영과 더불어 개경에까지 침략한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왜구 토벌에는 전문가라할 신흥 무장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가 그 변수다북쪽에서 침략하는 홍건적과 남쪽에서 약탈하는 왜구는 당시 고려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홍건적은 중국 내 반원 운동에서 발생했지만 왜구는 왜 출현한 걸까? 사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 남해안을 침략했으니 낯선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고려 말에 특히 왜구가 극성을 부린 데는 일본 내의 사정이 관련돼 있다. 1333년 가마쿠라 바쿠후가 붕괴하면서 일본에서는 그 뒤를 이은 무로마치 바쿠후와 천황 세력이 각각 별도의 천황을 옹립하면서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약 60년 동안 남북조시대라 부르는 분열기에 접어든다. 중앙 권력이 확고하지 못한 이 혼란기를 틈타 왜구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왜구들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동해안까지 휩쓸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우왕의 치세 14년간 왜구가 고려를 침략한 것은 무려 378회였다고 한다.

 

사실 가문의 배경으로 보면 이성계는 친원과 반원에 양다리를 걸칠 수도 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원나라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소속 장수로 있다가 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했을 때 총대를 거꾸로 메고 고려군에 내응해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그런 그가 조선을 세운 것은 어찌 보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친 박정희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므로 이성계는 아버지 대에서부터 비로소 정식 고려 백성이 된 셈이니 고려 왕조에 대한 각별한 애국심이 있을 리 없다. 양 손에 떡을 쥐고 망설이던 그가 노선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상관인 최영과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도 몰랐겠지만 그 사소한 갈등은 최영에 대적할 만한 물리력을 물색하던 사대부 세력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새 왕조의 건국이라는 원대한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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