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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수구와 진보(우왕, 자제위, 이인임, 최영, 이성계)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6부 표류하는 고려 -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수구와 진보(우왕, 자제위, 이인임, 최영, 이성계)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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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구와 진보

 

 

신돈(辛旽)이 실각의 조짐을 보이던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몰고 실로 오랜만에 한족 제국인 명()을 세웠다. 그리고 신돈이 처형된 뒤 고려의 권력은 다시 권문세족이 장악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중국의 신흥국 명나라와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고려의 관계가 장차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반원을 내세웠던 공민왕(恭愍王)은 명나라의 등장이 반갑기만 하다. 그래서 그는 주원장(朱元璋)이 명 태조(太祖, 재위 1368~98)에 즉위하자 곧바로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명나라를 섬길 뜻을 전한다(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또 다른 모국을 찾은 격이니, 고려의 반원 운동이 결코 자주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에 대해 명 태조는 공민왕의 책봉 문서와 달력을 고려로 보냈으며, 공민왕(恭愍王)은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사대관계가 설정되었다. 원래부터 고려의 차세대를 주도할 세력이 신진사대부라고 보았던 공민왕이었으니 중국의 한족 왕조에게 접근하는 것은 이념적으로도 일관된 태도다. 게다가 공민왕은 원나라의 잔당인 동녕부(東寧府)를 공략하여 랴오둥으로 내몰고 한반도 북부를 수복함으로써 영토적인 이득도 거둔다.

 

이렇듯 민첩한 공민왕의 순발력에,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친원을 고수하고 있는 권문세족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때마침 신돈이 그들과 왕의 공동의 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와중에서 그들은 공민왕(恭愍王)에게 배척당하고 제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돈이 실각한 뒤 먼저 제거된 것은 권문세족이 아니라 공민왕이었다. 그간의 모든 개혁이 미완성으로 끝난 이유가 개혁 주도 세력이 부재하거나 부실한 데 있다고 본 공민왕의 판단은 옳았다. 그래서 그는 1372년에 자제위(子弟衛)라는 기관을 설치하는데, 좋은 가문 출신의 젊은이들을 모아 장차 개혁을 이끌 인재로 양성하려는 목적이었으니 여기까지도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자제위 소속의 홍륜(洪倫)이라는 자가 공민왕(恭愍王)의 후궁과 간통을 저지르는 사태가 일어나자 공민왕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崔萬生)을 죽이려다가 그만 홍륜과 결탁한 최만생의 손에 살해당하고 만다.

 

권문세족은 손도 대지 않고 시원하게 코를 푼 셈이었다. 열 살짜리 우왕(禑王, 재위 1375~88)조선 초에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에는 우왕이 신돈(辛旽)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고려 왕조의 격을 낮추기 위한 역사 조작일 가능성이 짙다(고려사는 공민왕의 자제위도 음행을 일삼는 문제있는 집단으로 왜곡하고 있다). 후사가 없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제거한 뒤 전에 신돈이 소개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음을 공표하고 그 아이를 궁중으로 데려가 후계자로 교육시켰는데, 그가 바로 우왕이다. 물론 그 여자가 신돈의 첩이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랬다면 공민왕이 굳이 그 아들을 후사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을 옹립하고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 권신 이인임(李仁任, ?~1388)은 즉각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작업에 착수한다. 공민왕이 일궈놓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취소하고 멀리 고비 사막 북쪽으로 도망친 원나라의 잔당(북원)에 접근한 것이다. 때마침 얼마 전에 공민왕의 독단적인 동녕부(東寧府) 정벌로 고려에게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던 명나라는 더욱 태도가 싸늘해진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 일파의 시대착오적인 자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명나라가 아니라 고려 내의 신진사대부다. 그 대변인 격인 정몽주(鄭夢周, 1337~92)이색(李穡)의 제자로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정도전(鄭道傳, 1337~98)은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가면서도 친명(親明)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바야흐로 고려 내 권력구도는 본격적으로 수구 대 진보의 전선으로 나뉘었다(친명 노선을 진보적이라 부르기는 좀 곤란하지만 수구파와 대립되는 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멤버로 볼 때 그 전선은 권문세족 대 신진사대부이며, 외교적으로는 친원 대 친명, 종교적으로는 불교 대 유교의 대립이다.

 

왕권이 사실상 실종된 상황에서 두 세력이 다툼을 벌인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물리력일 것이다. 그 점에서 수구 세력은 훨씬 앞선다. 홍건적 토벌로 전국민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데다 시중의 자리에까지 오른 최영(崔瑩, 1316~88)이 바로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변수가 될 만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최영과 더불어 개경에까지 침략한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왜구 토벌에는 전문가라할 신흥 무장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그 변수다북쪽에서 침략하는 홍건적과 남쪽에서 약탈하는 왜구는 당시 고려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홍건적은 중국 내 반원 운동에서 발생했지만 왜구는 왜 출현한 걸까? 사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 남해안을 침략했으니 낯선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고려 말에 특히 왜구가 극성을 부린 데는 일본 내의 사정이 관련돼 있다. 1333년 가마쿠라 바쿠후가 붕괴하면서 일본에서는 그 뒤를 이은 무로마치 바쿠후와 천황 세력이 각각 별도의 천황을 옹립하면서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약 60년 동안 남북조시대라 부르는 분열기에 접어든다. 중앙 권력이 확고하지 못한 이 혼란기를 틈타 왜구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왜구들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동해안까지 휩쓸고 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우왕의 치세 14년간 왜구가 고려를 침략한 것은 무려 378회였다고 한다.

 

사실 가문의 배경으로 보면 이성계는 친원과 반원에 양다리를 걸칠 수도 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원나라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소속 장수로 있다가 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했을 때 총대를 거꾸로 메고 고려군에 내응해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그런 그가 조선을 세운 것은 어찌 보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친 박정희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므로 이성계는 아버지 대에서부터 비로소 정식 고려 백성이 된 셈이니 고려 왕조에 대한 각별한 애국심이 있을 리 없다. 양 손에 떡을 쥐고 망설이던 그가 노선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상관인 최영과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도 몰랐겠지만 그 사소한 갈등은 최영에 대적할 만한 물리력을 물색하던 사대부 세력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새 왕조의 건국이라는 원대한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의 실패가 부른 몰락

수구와 진보

구국의 쿠데타?

개혁이냐, 건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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