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반란’②
유자광도 역시 뛰어난 무예와 비위를 잘 맞추는 재주로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처지였으나 그밖에도 그에게는 남이에게 없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잔머리와 눈치가 바로 그것이다. 1468년 10월 그는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궁성에서 남이와 함께 당직을 서던 중에 들었던 남이의 속내를 예종에게 고한 것이다. 물론 남이의 입장에서는 세조가 죽고 난 뒤 흔들리는 시국을 논한 것이겠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될 수 있다. 유자광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다. 남이는 곧 체포되었고 조직을 대라는 추궁과 고문 끝에 엉뚱하게도 강순마저 끌어들여 함께 처형된다. 그 공로로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노사신 등이 다시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며, 유자광은 공신의 지위와 더불어 보너스로 가족이 몰살된 남이의 집까지 얻었다(이로써 또 다시 공신의 수가 늘었다).
단순히 유자광이라는 인물의 모함으로 남이라는 인물이 죽은 사건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억울한 사건일지라도 역사적으로는 중요하다 할 수 없다. 남이의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 속사정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정황에 있다. 무엇보다 반란이요 역모로 규정되었음에도 지극히 조용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다. 앞서 사육신(死六臣) 사건의 경우에는 그래도 반역의 음모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고 반란의 실체도 있었으나 이번 경우는 그런 실체가 없는 ‘말만의 역모’가 피바람을 부른 격이다【그래서 야사에는 남이가 유자광의 모함을 받은 경위에 관해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남이는 칠언절구로 된 멋드러진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을 번역하면 이렇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끓게 하고 /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말리도다 / 사나이가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 후대에 누가 대장부라 불러주리[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이 호방한 시의 셋째 구절인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에서 유자광은 ‘평(平)’을 ‘정(征)’으로 살짝 바꾸었다고 한다. 글자 한 자만 바뀐 것이지만 뜻은 ‘사나이가 나이 스물에 나라를 정복하지 못하면’이 되었으니 정치적 야심이 뚝뚝 묻어나는 의미로 완전히 달라졌다.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지만,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로 목숨이 왔다 갔다할 만큼 예민한 당시의 정국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그러나 특이한 사건도 자주 일어나면 평범한 사건이 되게 마련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후 조선에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행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모함만으로 ‘대형 역모’가 꾸며지고 대규모 처형과 옥사가 뒤따르고 아울러 그때마다 공신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웃지 못할 현상이 속출하게 된다. 이런 해프닝에도 그럴듯한 이름이 있는데, 머잖아 터져나오는 이른바 사화(士禍)가 바로 그것이다.
▲ 두 가지 반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이시애와 남이의 반란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사건이었다. 이시애는 세조의 중앙집권책에 반대해서 일으킨 실제 반란이었고, 남이의 사건은 순전히 말로만 엮인 역모였다. 보편적인 역사에서라면 전자의 경우가 많아야겠지만, 희한하게도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다. 사진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도 억울하게 죽은 남이장군의 묘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