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으로 가는 길③
자칫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치명타를 얻어맞을 뻔했던 영조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탕평책(蕩平策) 덕분이었다. 1727년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전략에서 소론을 등용한 정책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맞아 떨어진 결과다. 이로 인해 유화 국면이 되면서 갑자기 동조자들이 적어지자 그동안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우후죽순처럼 뻗어가던 반란 세력의 기세는 일순간 크게 휘청거린다. 급기야 그들은 그늘에 있다는 장점마저도 잃어 버리게 된다. 소론의 한 보스였던 최규서(崔奎瑞, 1650 ~ 1735)라는 자가 마음을 돌려먹고 조정에 역모의 정보를 알린 것이다.
이제 이인좌 일당은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 되었다. 이래저래 역적으로 찍혔으니 그동안 준비했던 무력으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1728년 3월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청주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반란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간의 선전전이 효과를 본 걸까? 청주를 장악한 그들이 경종(景宗)의 위패를 모시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자 영남과 호남에서도 그에 호응하는 반군이 들고 일어났다【이탄은 바로 소현세자의 증손자다. 앞서 보았듯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부모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으나 막내인 이회(李檜)만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소현세자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탄은, 영조의 치세에도 사은사로 명 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권에 반발하지 않았고 반군과도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탓에 반란이 진압된 뒤 처형을 당하고 만다. 증조부의 억울한 죽음이 집안의 내력이 되어 버린 걸까?】.
만약 그들의 세력이 한데 합쳐졌다면 영조(英祖)의 정권은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정보를 얻은 덕분에 관군은 반군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고, 반군을 하나씩 차례로 토벌해서 결국 열흘 만에 진압에 성공했다. 영조(英祖)가 탕평책을 조금만 더 늦게 시행했다면 아마도 이인좌의 반란은 세번째의 성공한 쿠데타, 즉 반정이 되지 않았을까?
무사히 진압되었기에 그 사건은 오히려 영조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은 그것을 계기로 소론 강경파가 몰락한 탓에 혼란스러웠던 정국이 안정되었다는 게 크다. 소론이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소론 온건파는 ‘면피’를 위해 반란의 진압에 특히 앞장섰으나, 어쨌든 이 사태 이후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영조로서는 탕평책(蕩平策)이 과연 효과 만점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되었다는 데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노론이 우위를 차지하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세력의 균형이 유지된다.
그러나 영조(英祖)는 쌍거호대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관직을 두 세력 간에 고르게 배분함으로써 균형을 꾀하는 방법은 워낙 당쟁이 극심했기에 취했던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원래 인사의 요체란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는 것이지 세력 안배에 따른 나눠먹기가 아니기 때문이다(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흔히 적용하는 지역 안배도 마찬가지다).
정국 운영에서 자신감을 얻은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바로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전략이다. 이것으로 탕평책은 당쟁의 치유책이라는 출발의 한계를 벗어나 적극적인 인재 등용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영조의 눈에는 왕국으로 향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왕국으로서 가능한 각종 개혁 조치가 추진되는 것은 그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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