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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왕국으로 가는 길②: 탕평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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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왕국으로 가는 길②: 탕평책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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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으로 가는 길

 

 

왕국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당파를 육성하는 길이다. 일찍이 세조(世祖)가 그랬듯이, 그리고 100년 전의 광해군(光海君)이 그랬듯이, 측근 세력을 키우면 국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조와 광해군이 결국 실패한 데서 보듯이 그것은 오히려 왕의 측근들이 훈구파를 형성해서 권세를 휘두르는 또 다른 폐해를 가져왔다(게다가 그 훈구파가 당쟁을 유발한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나마 세조는 임기 내내 카리스마를 유지했지만 광해군은 재위중에 사대부(士大夫)들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뭘까?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제3의 길은 뭘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되 각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런 점에서 탕평책은 오늘날 대통령 중심제에서의 양당 제도와 닮은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사실 탕평책의 기본 이념은 일찍이 선조 때 이이가 역설한 바 있다.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현상을 보고 이이는 양측을 치우치지 않게 대우하고 인사의 공평성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이미 숙종(肅宗) 때 영의정을 지낸 박세채(朴世采, 1631 ~ 95)와 최석정(崔錫鼎, 1646 ~ 1715)탕평책(蕩平策)을 정식 정책으로 채택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했다(탕평이라는 말은 서경에서 인용되었다). 숙종 역시 그 건의를 받아들일 의도는 있었으나 끝내 실천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세채와 최석정이 모두 소론의 보스였으나 정작 탕평책을 시행한 것은 노론이 옹립한 영조(英祖)라는 점이다.

 

영조(英祖)의 치세에 서로 대립하는 두 당파는 노론과 소론이다. 이들 간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인사를 고르게 하면 된다. 예컨대 노론의 인물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좌의정은 소론의 인물로 임명하는 방식이다. 배분이 엇비슷하니까 양측은 불만이 있을 수 없으며, 만약 한측이 앞서가는 분위기라면 다른 측이 제어할 수 있으므로 자연히 힘의 균형이 유지된다. 이것이 탕평책의 첫번째 수단인 쌍거호대(雙擧互對, 둘을 등용해서 서로 견제하게 한다)의 전략이다. 마치 초등학교 교사가 어린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유치한 수단이지만, 영조는 아주 중요한 집권 초기에 그 전략의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그 덕분에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英祖)의 즉위에 가장 반대한 세력은 물론 소론이다. 특히 소론 중에서도 강경파는 박탈감이 더욱 심하다. 그들은 심지어 경종(景宗)이 병사한 게 아니라 노론 측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영조가 숙종(肅宗)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판에 영조가 김일경 일당을 축출하고 노론을 조정에 복귀시키자 그들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제는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사가 걸린 문제다. 사태를 위기로 판단한 소론의 이인좌(李麟佐, ? ~ 1728)는 비밀리에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무리를 끌어모은다. 여기에는 정희량(鄭希亮, ? ~ 1728), 박필현(朴弼顯, 1680 ~ 1728) 등 소론의 매파 인물들만이 아니라 예전에 노론에게 배척당했던 남인들도 대거 참여한다. 자신감을 얻은 이인좌는 중앙만이 아니라 전국 각 지방에서 현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점차 규합해간다.

 

이들은 일단 전국 각지에 경종(景宗)이 의문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대자보를 붙이며 선전전으로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 다음 단계는 물론 역모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과거와 같은 말만의 역모를 벗어난 수준이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짜 역모를 꾸민다. 양민과 노비는 물론 산적떼까지 동원해서 군사력을 준비한 것이다. 두 차례의 반정을 제외하면,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된 이래로 사대부 세력이 물리력까지 갖추고 진짜 반란을 획책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다(정여립의 사건이 있었으나 그 경우는 사실 여부가 확실치 않다).

 

 

분열 극복의 상징물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거두자 영조는 두 번 다시 이 땅에 당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742년에 탕평비를 세웠다. 비문은 자신이 직접 썼는데, 탕평비를 세운 곳이 성균관이라는 사실은 그곳이 바로 당쟁의 온상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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