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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경종, 신임사화, 영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경종, 신임사화, 영조)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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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

 

 

장희빈은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가 남긴 아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된 뒤에도 인현왕후는 끝내 후사가 없었고 이듬해에 맞아들인 셋째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교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태생에 결격사유가 있는 세자의 왕위계승이 순조롭기는 어렵다. 마침 숙종(肅宗)에게는 적자는 없어도 서자는 또 있었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있었던 1694년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가 아들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낳은 것이다. 최씨 역시 원래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의 신분이었으니 연잉군도 신분상 하자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세자나 연잉군이나 서자에다 하자까지 같았으므로 일단 세자가 즉위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 당쟁의 불씨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부실한 왕이 즉위하는 것은 아무래도 낌새가 좋지 않다.

 

건강했다 하더라도 왕좌가 바늘방석 같았겠지만 경종(景宗, 1688~1724, 재위 1720~24)은 몸과 마음이 모두 편치 않았다. 그는 세자 시절에도 병약해서 아버지의 속을 무던히 태웠다. 하지만 그의 병은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탓에 얻은 것이었으니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 숙종(肅宗)으로서는 사실 자승자박인 셈이었다. 마침 세자에게 후사도 없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숙종은 비밀리에 노론의 이이명(李頤命, 1658~1722)에게 연잉군을 다음 후계자로 옹립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 숙종의 사후 그 명령이 공개되면서 연잉군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는데, 왕의 동생으로서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희한한 경우다(개국 초기 태종이 형 정종의 왕세제였던 경험이 있으나 그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이렇듯 묘한 사정이 생겼으니 사대부들의 분위기도 뒤숭숭할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본 바 있듯이 어려울 때는 단합하다가도 살림이 피면 분열하는 게 조선 사대부들의 천박한 생리다. 서인 역시 집권당이 되자 야당시절에는 봉합되어 있었던 노론과 소론의 내부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다. 이미 숙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소론은 경종(景宗)을 지지했고 노론은 연잉군을 끼고 돌며 따로 놀았다. 그래서 갑술환국(甲戌換局) 직후 숙종은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을 영의정에 기용하면서 소론을 위주로 조정의 판을 짠 바 있었다(경종을 밀면서도 이이명에게 연잉군을 부탁했으니 결국 양측의 갈등을 부추긴 사람은 당쟁을 종식시키려 애썼던 숙종이다). 아마 그는 일단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그렇게 했겠지만, 그렇다면 경종의 치세에서는 소론이 단독질주를 해야 할 텐데 오히려 양측 간의 대립은 더 격화된다. 경종이 병으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대립에 부채질을 했다.

 

 

 

 

경종(景宗)의 즉위에 합의해준 대가로 노론은 정승직을 비롯해서 조정의 요직에 포진하게 된다. 그러나 실권은 아무래도 현직 왕을 끼고 도는 소론에게 있으므로 노론은 적잖이 당할 수밖에 없다. 1721년 노론은 경종이 국왕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실정을 감안해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오히려 소론의 역공을 받아서 이이명,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이건명(李健命, 1663~1722), 조태채(趙泰采, 1660~1722)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역모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된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이듬해에는 일개 지관(地官, 풍수지리 전문가)에 불과한 목호룡(睦虎龍)이라는 자가 노론에게 반역의 기운이 있다며 무고를 하자 소론은 그것을 빌미로 60여 명의 노론 일당을 처형한다(노론 4대신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이것이 이른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리는 사건인데 신임이란 신축년과 임인년, 1721년과 1722년을 가리킨다), 연좌로 처벌된 인원은 무려 10명이 넘었다. 원래 묵호룡은 노론의 인물이었으나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1662~1724)에게 매수되어 자백의 형식으로 노론의 역모를 고발했다. 그에 따르면 노론 측은 이른바 삼급수(三急手), 즉 칼과 약과 모해라는 세 가지 수단으로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런 자백만으로 정치적 대형 사태가 빚어졌다는 것은 조선의 정치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말해준다. 그 전까지의 사화(士禍)나 환국은 그래도 정치 세력 간의 모함으로 빚어진 데 비해 이제 한낱 점쟁이의 무고가 대규모 옥사를 일으킬 정도라면 이제 말만의 역모는 정점에 달한 느낌이다. ‘무고로 반대파에게 타격을 가하는 황폐한 관습은 우리 역사에서 뿌리가 깊다.

 

조정의 색깔이 소론 일색으로 바뀌자 누구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람은 다름아닌 연잉군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음모 하나로 숙청되는 분위기라면 왕세제라고 해서 안전할 수는 없다. 다른 왕위 계승 후보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 다행이지만, 두 차례나 반정의 역사가 있었던 사대부(士大夫) 정치에서는 단독 후보라도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노론을 대신해서 자신을 비호해줄 패트론(patron, 후원자)을 찾아 인원왕후의 품으로 뛰어들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다급해진 그는 형인 경종(景宗)에게 의탁하고자 했으나 소론은 그가 경종을 병문안하는 것조차 가로막았다). 대비는 소론 세력에게 간절히 호소해서 연잉군을 최대한 보호해주었다. 그것도 오래 끌었다면 그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724년에 경종이 마침내 죽었다.

 

소론은 경종이 살아 있을 때 연잉군을 없애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연잉군은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76)로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김일경과 목호룡 등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주범들을 처단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당쟁이 벌어지는 걸까?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그간 사대부(士大夫) 세력들끼리 치고받은 싸움은 많았어도 국왕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나의 세력을 숙청한 것은 인조(仁祖)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당쟁을 그냥 놔뒀다가는 필경 나라가 망하리라는 위기 의식이다. 이 점은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일단 그도 자신의 세력이 필요하므로 이듬해인 1725년에는 노론을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쟁을 재연시킬 생각은 전혀 없다. 정계에 복귀한 노론이 소론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극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영조(英祖)는 노론 내의 강경파를 쫓아내 버림으로써 당쟁의 불길을 잡겠다는 굳은 각오를 공개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그는 소론의 온건파를 등용해 균형을 맞춘다. 이제 영조는 당쟁을 제어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개발한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이라 부르는 정책이다.

 

 

오랜만의 왕 무수리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만큼 영조는 신분 콤플렉스가 있었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대부(士大夫) 체제와 당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가 전성기일 때 성장했기 때문에 아버지 숙종(肅宗)과 달리 중화 사상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가 왕정복고를 시도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배경이 크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

왕국으로 가는 길

건국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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