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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반정의 예방조치③: 수원화성의 기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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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반정의 예방조치③: 수원화성의 기능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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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의 예방조치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정조(正祖)가 수원에 보인 애착은 이상할 정도로 강했다. 우선 그는 그 전까지 수원부(水原府)로 불리던 이곳을 부사(府使)가 관장하는 곳에서 유수(留守)가 관장하는 곳으로 승격시키고 화성(華城)으로 개칭했다(오늘날로 치면 광역시로 격상된 것이다). 게다가 정조는 성(지금은 이 성을 화성華城이라고 부른다)을 새로 축조하고 네 개의 대문을 만드는가 하면 여기에 각종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해서 완벽한 신도시로 탈바꿈시켰다. 1794년부터 2년이 넘게 걸린 이 대형 토목공사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기술자가 동원되었고 100만 냥에 가까운 돈과 1500석의 양곡이 소요되었다. 10년치의 국방 예산을 앞당겨 쓰면서까지 그가 화성의 축조를 서두른 이유는 뭘까? 수원의 4대문에 서울의 4대문에도 없는 삼엄한 방어 시설까지 갖춘 이유는 뭘까?

 

일단 추측할 수 있는 해답은 혹시 정조(正祖)가 수원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도읍을 옮긴 경우는 한 차례도 없을뿐더러 천도의 계획조차 반란 세력이라면 몰라도 국왕이 구상한 적은 없었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정조가 종묘 사직을 버리고 수원 천도를 결행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그가 수원에 정성을 들인 이유는 한 가지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바로 대피처의 기능이다. 반정을 걱정한 그는 만약 노론 벽파가 실력 행사에 나설 경우, 그리고 그들의 거사가 성공해서 한양을 빼앗겼을 경우 화성으로 대피할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의 일부를 화성의 수비 병력에 할당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능을 지킨다는 것은 명분이었으리라.

 

 

 또 하나의 도성 정조가 축성한 화성의 모습이다. 한양의 도성에도 없는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정조는 아마 자신의 개혁에 대한 반발로 내란이 벌어질 경우 대피처이자 임시 수도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장용영의 외영을 그곳에 주둔시킨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리라. 화성의 설계는 정약용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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