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의 거부권③
그것은 가뜩이나 세자의 처신에 분노하고 있던 영조로 하여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실수를 저지르게 하기에 족했다. 나경언의 고발이 있었던 날부터 세자는 석고대죄를 시작했으나 영조는 20일이나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나라의 앞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한 것이다. 한 번 아들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는 가혹했다. 신하들이 세자의 자결을 극구 만류하자 영조(英祖)는 세자를 서자로 강등시켰다. 사실 세자는 계비의 소생이 아니므로 원래 서자였으나 세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적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조치는 곧 세자를 폐위하겠다는 뜻이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겠으나, 영조는 세자를 이미 정치적으로 죽여놓고도 생물학적으로도 죽이려 했다. 결국 세자는 아버지의 명으로 뒤주에 갇혔다가 여드레 만에 그 안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그의 아내인 경의왕후(敬懿王后, 우리에겐 혜경궁 홍씨로 더 잘 알려져 있다)에 의해 『한중록(閑中錄)』이라는 책으로 기록되는데, 물론 여기서는 사대부(士大夫)들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장헌세자의 억울함이 소상히 나와 있다. 아마 그녀는 책 제목을 ‘한중록(恨中錄, 한스러운 내심에 대한 기록)’이라 붙이고 싶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이지만, 이 사건은 정치적 함의도 대단히 크다. 영조(英祖)는 왕국을 한 발 앞에 두고 갑자기 물러서 버렸다. 왜 그랬을까? 유구한 전통의 사대부 체제를 자신의 대에 뒤집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걸까?
세자가 죽은 직후 영조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묘한 방식으로 달랜다. 서자로 퇴출시켰던 아들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고, 장례식을 직접 집전한 것이다(그 때문에 장헌세자는 사도세자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알려졌다). 그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분명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했던 듯하다. 게다가 공석이 된 세자 자리를 세자의 아들인 이산(李祘, 뒤의 정조)에게 잇게 한 것은 세자가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영조(英祖)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영조에게 다른 아들은 없었으나 손자는 많았다).
그렇다면 영조의 의도는 확실해진다. 세자에게 가해진 고발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또한 노론이 세자를 축출하는 데 음모를 동원했든 않았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여권의 왕위계승자를 ‘여당’이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영조는 노론이 배척하는 세자에게 왕권을 상속시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조의 처지가 불가피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조선의 왕국화가 아직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아마 탕평책(蕩平策)으로 왕권 강화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던 영조도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터이다).
그러므로 새 세자(정확히 말하면 세손世孫이라 해야겠지만)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은 할아버지가 중단한 왕국화를 다시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타이밍을 놓친 만큼 그 작업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따라서 이제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신중을 기해서 장기적인 호흡으로 추진하든가, 아니면 반대로 더 신속하고도 급진적으로 추진하든가, 1777년 영조(英祖)가 죽은 뒤 조선의 22대 왕으로 즉위한 정조(正祖, 1752 ~ 1800, 재위 1777 ~ 1800)는 그 중에서 후자의 노선을 택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