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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반정의 예방조치②: 장용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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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반정의 예방조치②: 장용영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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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의 예방조치

 

 

물론 정조(正祖)도 뒤통수에 꽂히는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몰랐을 리 없다. 아마 그도 익히 알고 있었겠지만, 사대부(士大夫)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 가장 우려할 사태는 단 한 가지, 반정(反正)뿐이다. 왕이 허수아비일 때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는데, 그 경우 그들이 구사하는 수단은 언제나 말만의 역모다. 수많은 당쟁에서 보았듯이 한 편이 다른 편을 역모로 엮어 왕의 이름을 빌려 처벌하는 식이다. 그러나 왕이 왕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는 말만의 역모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도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사대부들이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는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그 중 이인좌의 난은 실패한 반란으로 끝났고 나머지 두 차례는 각각 중종반정(中宗反正)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사대부가 승리한 경우였다. 따라서 정조(正祖)가 대비할 것은 반정의 예방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1785년 정조는 국왕을 특별히 수호하는 친위대를 만들고 이것을 장용위(壯勇衛)라 불렀다. 규장각(奎章閣)과 마찬가지로 장용위도 일찍이 세조가 처음 설치한 군대였으니, 여기서도 정조가 세조(世祖)를 왕다운 왕으로 여기고 자신의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세조(世祖)가 처음 설치할 때의 이름은 장용대(壯勇隊)였다. 이 장용대의 병사들은 무술에 능한 천인들로만 뽑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오늘날 유사시에 적진 깊숙이 파견되는 특수 부대도 전과자들처럼 일반 군대에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로 구성하듯이, 장용대 역시 국왕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목숨을 걸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름도 신분도 없는 결사특공대인 셈인데,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世祖)였기에 반대파의 책동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렇듯 강력한 친위대가 필요했을 터이다. 성종 때 이름이 장용위로 바뀌면서 양인들도 포함시키게 되는데, 곧이어 조선이 사대부 체제로 바뀌면서 이 군대는 존재의 의미를 잃고 유명무실해졌다.

 

1793년 그는 장용위를 확대 개편해서 장용영(壯勇營)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그가 이 시점에서 갑자기 군대를 신설한 이유는 뭘까? 그것도 하필 친위대를, 비중화세계의 도전이 거세었던 16세기 이전이라면 몰라도, 또 비록 허망한 환상이나마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획책하던 무렵이라면 몰라도 이제 조선에서는 군대의 필요성이 사실상 없어졌다. 동북아가 비중화세계로 바뀌면서 해안을 주름잡던 왜구도, 북방을 괴롭히던 여진족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중화세계가 중심이었을 때 왜구와 여진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썼으나 이제는 문명의 수준이 역전되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 설사 군대가 필요하다 해도 국방용이 아닌 친위대를 굳이 신설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정조(正祖)가 장용영을 설치한 의도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반란, 좁게 말하면 노론 벽파의 준동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조선 역사상 세 번째의 반정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다.

 

그러나 장용영의 기능은 그것만이 아니다.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내영은 설립 취지에 걸맞게 도성을 수비하는 군대니까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외영의 임무는 아주 색다르다. 이 군대는 엉뚱하게도 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왜 느닷없이 수원일까? 일단 장헌세자의 능이 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융릉隆陵)의 방비를 외영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효자라고 해도 친위대의 절반을 할당하면서까지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게 한다는 게 과연 이치에 맞는 발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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