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난국③
애초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왕위에 올랐던 철종은 재위 중에도 자신의 뜻과는 달리 민란으로 얼룩진 시대를 보내고서 1863년에 죽었다. 그는 익종, 헌종(憲宗)과 달리 서른을 넘겨 살았지만 딸 하나만 두었을 뿐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미 철종의 경우에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어 이제는 조정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이제는 공식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왕실의 또 다른 후손을 찾아낸 다음 ‘국왕 과외’를 교습시키고, 그동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왕을 장가보내 외척을 붙여주고 친정을 하도록 독립시키는 게 그 공식이다.
각본은 있으니 캐스팅만 하면 된다. 대비의 역할은 익종의 과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 ~ 90)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어머니 순원왕후의 그늘에 가려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왕실에서 가장 지체 높은 어른이 되어 있다. 따라서 다음으로 중요한 왕의 캐스팅에 관한 권한은 신정왕후가 지니고 있다(원래의 의미와는 다르지만 이런 게 바로 진짜 ‘캐스팅보트casting vote’가 아닐까?). 조만영(趙萬永)의 딸이므로 우리에게는 ‘조대비’로 잘 알려진 신정왕후는 당연히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에 의해 몰락한 자신의 가문을 부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왕의 캐스팅에 더욱 열심으로 노력한 결과 적임자를 찾아낸다.
순원왕후가 은언군의 후손에서 철종(哲宗)을 발굴해냈다면, 조대비는 은언군의 동생인 은신군(恩信君)을 맥으로 삼았다. 은신군의 손자인 이하응(李昰應, 1820 ~ 98)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흔 살이 넘었으니 왕실의 대를 잇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를 찾아 나서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그에게는 명복(名福)이라는 열한 살짜리 둘째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이하응의 맏아들은 열여덟 살이었으므로 왕이 되기에는 너무 ‘고령’이다), 조정에 아직 버티고 있는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려는 조대비와 아들을 왕위에 올릴 절호의 기회를 맞은 이하응, 이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결과 명복 소년은 조선의 26대 왕인 고종(高宗, 1852 ~ 1919, 재위 1863 ~ 1907)으로 즉위하게 된다(정조正祖 이후 조선의 여섯 왕은 모두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이었기에 나중에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했다)【이하응은 십대 시절에 부모를 모두 여읜 뒤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숱한 고초를 겪었으니 안동 김씨에 반대하는 심정은 결코 조대비에 뒤지지 않았다. 특히 안동 김씨가 권좌에 컴백한 철종(哲宗)의 치세에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며, 심지어 안동 김씨 가문들을 찾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다시피 한 탓에 온갖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야심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조대비의 조카에게 접근해서 대비를 소개받았고, 마침내 아들을 왕위에 올린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왕족으로서 밑바닥 생활까지 해본 처지였기에, 장차 권력을 손에 쥐면 세상을 한번 자기 뜻대로 만들어보겠다는 야망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 기구한 왕후 순원왕후의 칠십 평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순조), 아들(익종), 손자(헌종)를 차례로 보낸 뒤 만년에는 왕통이 끊기자 강화도령(철종)에게 왕실 과외까지 시켜야 했다. 사진은 그녀가 쓴 한글 편지들인데, 19세기 한글의 어휘와 서체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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