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와 토지조사②
그에 비해 일본은 역사적으로도 봉건 영주들이 각자 자신의 장원을 소유하는 방식의 토지제도를 취하고 있었던 데다【중세 일본의 경우 한반도와 비슷한 제도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조세를 수취하는 반전제(班田制)가 있었으나, 이 제도의 적용 단위는 한반도의 경우처럼 나라 전체가 아니라 장원이었다. 즉 봉건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에서반전제를 시행하면서 독자적으로 조세를 수취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 역사에서는 이 장원을 ‘나라(國, 구니)’라고 불렀으므로, 정치적 위상으로만 비교해 보면 일본의 한 지방은 곧 한반도 왕조 전체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의 경우처럼 ‘독자적인 천하’의 역사를 꾸려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적 토지 등기제도가 성립되어 있었으므로 토지 소유관계가 훨씬 명확하다. 말할 것도 없이 합병이란 이제부터 일본과 한반도에서 하나의 제도를 적용한다는 뜻이니까 이 점을 잘 이용하면 한반도 농민들의 토지를 통째로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취지에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시행된 게 바로 토지조사사업이다.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 소유관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사실상 모든 토지제도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왕토의 개념이 무너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토지의 매매까지도 이루어질 정도 였다. 다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게 아니라 관행적으로 묵인되어 왔다는 게 문제인데(현실적으로는 왕토 사상이 해체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노린 약점은 바로 그 공식과 관행의 틈이었다【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약점이 되고 있는 ‘투명성’의 문제는 이렇게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토지의 실제 소유권과 형식적 소유권이 다르다는 것은 늘 실제 권력자와 상징적 권력자가 분리되어 왔던 조선 역사의 필연적인 ‘불투명’을 반영한다】.
우선 전통적인 대지주의 토지는 건드리기 어려우니까 그대로 등기화해서 그 소유를 인정해준다. 또 소유권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일부 농민들의 토지도 등기를 거쳐 소유권을 인정해준다. 여기까지가 바로 토지조사사업의 긍정적인 측면이다(토지 소유의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러나 원래 없었던 공식적인 기준을 처음으로 설정했으니 그 기준에서 벗어난 토지의 소유관계는 모조리 비공식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무효가 된다. 즉 소유권을 문서로써 입증할 수 없는 모든 토지는 졸지에 임자 없는 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등기권자만 없을 뿐 경작자는 있었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제도에서 경작권이라는 모호한 권리는 전혀 배려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사실상 자기 땅으로 알고 대대로 경작해 오던 농민들은 이제부터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새로 설정된 지주에게 높은 소작료를 물고 계속 땅을 부쳐먹든가, 아니면 고향을 등지고 새 땅을 찾아 떠나는 것뿐이다. 말이 두 가지지 대다수 농민들은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렇게 해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나게 된다. 게다가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다.
▲ 이상한 주식회사 이름은 주식회사지만 설립 취지에서나 기능과 임무에서나 동척은 주식회사라기보다는 조선의 농민들을 만주로 내몰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간도와 만주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만주 침략이 용이해졌으니, 일본 정부는 애초부터 그런 효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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