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20:42
728x90
반응형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칸트는 보편적 입법자의 소리를 자율적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의 명령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요. 만약 프로이트나 니체의 지적이 옳다면, 장씨 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주체도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말하기엔 거리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칸트의 도덕법칙, 즉 양심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하나의 숭고한 목적으로 드러나자마자, 우리의 구체적인 삶은 그 목적에 종사해야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점입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일을 하느라 몹시 피곤할 때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는 집에 들어와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이 더럽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피곤한 몸을 누이고 즉시 휴식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내면의 보편적 입법자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불쾌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 결국 우리는 거의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방을 치우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붙이게 됩니다. 이것은 양심의 소리라는 것이 나와 무관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요? 그것은 진정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보다. 오히려 나를 수단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피곤한 자신을 위해서 방을 치운 것이 아니라, 내면의 초자아를 위해서 방을 치운 셈이 될 테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칸트의 주체에서 그리고 장씨 부인의 선택에서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배려, 즉 자신의 행복이나 즐거움이라는 측면입니다. 단지 내면에 보편적 입법자로 내재화된 공동체의 규칙, 그것에 대한 배려나 행복만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도덕이 본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이다. 우리는 자신이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이런 희망은 오직 도덕에 종교가 첨가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이 결국 행복의 윤리학이 아니라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윤리학을 흔히 의무의 윤리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은 마땅히 해야만 되는 행동에 관한 것이지, 나 자신의 행복에 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도덕이 본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행복해질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칸트는 종교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사는 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천국에 가서 신으로부터 그 대가를 받게 된다고 믿는 것을 그는 종교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에 가서야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과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칸트는 우리가 그런 믿음이라도 가지고 윤리적인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지상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아야겠지요.

 

칸트의 윤리학에서 행복이 불가능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단목적이란 개념을 빌려올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우리의 구체적 삶이 수단이라면, 내면에 있는 보편적 입법자가 곧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합니다. 그의 욕구야말로 나의 숭고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편적 입법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나의 삶 전체를 수단으로 삼아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행복은 내면의 도덕법칙이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의 삶 자체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칸트의 윤리학을 액면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면, 그는 순교자와 같이 죽음을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숭고한 도덕법칙이란 것도 결국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칸트는 우리의 삶을 수단과 목적으로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행복은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행복이란 것은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매우 짧은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어느 고등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이 학생에게 고등학교에서의 공부는 수단이 되고, 대학 입학은 목적이 되겠지요. 이 말은 결국 이 학생에게 있어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이 불행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학생의 행복은 너무 짧은 것이 아닐까요? 단지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는 그 순간에만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제 대학생이 되면 이 학생의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됩니다. 대학 생활도 취업이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간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학생이 설정했던 모든 목적, 즉 대학 진학 혹은 취업이란 것이 사실은 공동체에서 요구되는 규칙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장씨 부인이 생각했던 도덕법칙 그리고 칸트의 보편적 입법자가 정한 도덕법칙이 모두 공동체의 규칙의 흔적에 불과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많은 학생들이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갈 거야라고 자신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자유로운 주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과 결정은 결코 그들에게 지속적인 행복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단지 인생에 있어서 몇 차례의 순간적인 행복감 혹은 성취감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지요. 더 불행한 것은 이런 행복이 그들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보편적 입법자가 느끼는 것이란 점입니다. 칸트의 말대로 자신의 행위를 자유롭게 숙고해서 결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유로운 주체는 반드시 행복해지려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만으로 주체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체인지 아닌지를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지속적인 행복이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