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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여행기 - 55. 너의 불행이 나에겐 안도감이 아니길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카자흐스탄 여행기 - 55. 너의 불행이 나에겐 안도감이 아니길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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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너의 불행이 나에겐 안도감이 아니길

 

 

그 다음으로 간 곳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내린 역인 우슈토베역이었다. 역주변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1937년 당시엔 허허벌판에 가까웠다고 했다.

 

 

 

우슈토베역, 너의 아픔이 나의 안도가 아니길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역이, 고려인들이 당시에 보았던 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인 현장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막막함과 서글픔이 밀려오더라.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냐?’라는 울분 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참상은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서 이야기를 듣듯, 남의 일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용산참사가 났을 때,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남의 일처럼 들렸고 그들의 일처럼 들려 안 됐다라는 마음은 들었을지언정, 맘 속 깊은 울분은 없었다. 우리는 때론 남의 불행을 가십거리로 삼거나, 자신의 반복적인 삶을 반추하는 꺼리로 삼기도 한다. 그래서 남의 불행을 얘기하는 자리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지만, 남의 행복을 얘기하는 자리엔 재수 없다며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이다.

그처럼 나 또한 의식적으로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불행으로 치부하여 내 삶을 안도하려는 불순한 마음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런 불순한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동지이자 동포이며 한 민족이라는 공동체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슈토베역. 지금은 역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땐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 무작정 내려야 했던 사람들.  

 

 

 

고려인의 말

 

그 다음엔 중국에서 발원하여 여기까지 흘러와 우슈토베에 농경지를 만들 수 있게 한 까라타오강에 갔다. 바다와 인접하고 있지 않은 카자흐스탄에서 강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고려인들은 이 강을 잘 활용하여 개간을 하고 농경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강으로 우슈토베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어와 한국어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북한 말투 비슷한 것도 섞여 있고, 발음도 부정확했고, 간혹 러시아어의 단어도 섞여 들어가 자세하게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곳곳을 지나다니며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줬지만, 많은 부분을 놓쳤다.

고려인들도 2, 3세가 지나며 한글을 배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CIS지역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CIS 지역들이 자국중심주의가 강해지며 자국민 중심적인 행정을 펼쳤기 때문이다. 카작어를 하지 못하면 공직자가 될 수 없었고 여러 핍박들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 방도를 모색하며 바쁘게 살다보니, 국어교육에 소홀해졌고 2, 3세도 현지에 적응하다보니 더욱더 말을 잊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과 정신은 함께 가는데,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된다. 러시아어로 사고하는 사람이 국어로 사고하는 사람과 정신적인 측면에서 같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남아있는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주언어로 사용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이 국어를 잊고 말았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고려인강제이주기념탑. 저 큰 덩이리가 조선이고 나눠진 작은 부분들이 자신들이라 한다.  

 

 

 

친하다는 건, 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 속에 성립된다

 

저녁엔 여름성경학교에 온 재미교포 자녀들을 위한 캠프파이어가 열린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 처음 왔지만, 그들은 오늘이 우슈토베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샤슬릭과 김치찌개, 김치부침개를 준비했다. 그 덕에 우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과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이렇게 복이 넝쿨째 굴러오기도 하는 구나.’

초기 정착지 답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음식을 준비하느라 손이 분주했다. 한쪽에선 음식을 준비하고 그 옆에선 재미교포 학생들이 재밌게 놀았다. ‘이게 미국 문화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모두 똘똘 뭉쳐 재밌게 놀고 있었다. 자유롭게 춤을 추는 건 예사였고 서로 웃기기 게임도 하며 소소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우리들은 그냥 구경만 하는 편이었다.

 

 

멀찍이 아이들이 노는 걸 보고 있다가 여학생들과 승빈이는 함께 참여해서 놀았다.   

 

 

과함 곁에 불급이 따라 다니고, 절친 곁엔 배제되는 대상이 따라 다닌다. 친함을 과시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과는 친해질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치다. 이들은 이미 한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로 그 전부터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노는 게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똘똘 뭉쳐 있으니 종교도 다르고 친하지도 않던 우리가 낄 자리는 없었다. 식탁에 앉아 이 친구들이 노는 걸 관망하며 저녁이 다 되길 기다렸다.

오랜만에 배터지게 밥을 먹고 불에 소시지를 구워 먹으며 캠프파이어 분위기를 만끽하다가 숙소로 올라왔다.

우슈토베의 첫 날은 고려인들의 아픈 발자취를 더듬으며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있었는지 느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들이 이룩한 지반 위에서 우리는 살고 있고 그들의 아픔이 배인 땅에서 우리는 먹고 즐기고 있다. 그들이 피땀 흘려 심어놓은 행복을 우리가 따먹으며 살고 있었고, 그들이 절망 속에서 일군 희망을 채취하며 먹고 있었다.

 

 

원없이 샤슬릭을 먹었다. 이들의 마지막 밤 축제에 우린 운 좋게 참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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