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극단적 경쟁의식이 불인한 존재로 만든다
불인한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는지는 영화 『명왕성』을 통해 볼 수 있다.
▲ 교육의 문제를 전직 교사였던 감독이 흥미진진하게 다뤘다.
교육의 이름으로 괴물을 만들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자막을 통해 나오는 자살한 초등 6학년의 편지는 공부란 미명으로 사람이 어떻게 병들어 가는지 제대로 보여준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한 우리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보자.
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 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물고기가 되고 싶다.
잘 되라는 이유로 다음 세대에게 막중한 짐을 지우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교육을 통한 성공신화’만을 좇는 학생들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이 학교는 이른바 명문고로 상위등급의 학생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다. 그곳에 다니는 학생들은 예전 비평준화 시대에 경기고에 다니면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잰 체하며 학교에 다닌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만들고 싶어 하는 인재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괴물이 되어갈 수록 성공하게 된다는 게 문제다.
일등하고 싶으면 앞에 있는 아이들을 죽여!
하지만 명문고라는 브랜드파워를 등에 업었음에도 학생들의 표정과 눈빛은 죽어가고 있고 그 안에서도 경쟁의 칼바람은 매섭게 불고 있다. 늘 최상위 등수만 받던 학생들이 모였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의 잣대로 매겨진 등수는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 꼴찌도 있고 전교 꼴찌도 있다. 여기선 모두 경쟁자일 뿐 친구나 도반道伴이 될 수 없다.
한 학생이 67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등수를 받자, 그걸 보고 있던 교우가 한 마디 건넨다. 이 말이야말로 여는 글에서 말했던 ‘마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줌과 동시에 불인의 극단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니가 일등하고 싶으면, 앞에 있는 66명을 죽이면 된다.”
마비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하게 한다. 타인과의 소통을 차단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어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나만 잘 될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럴 때에 자신이 생각한 목표를 쉽게 달성할 수 있으며,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성공을 위해선, 비교 우위에 서기 위해선 어떤 것을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불인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입시성적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 것일까? 누구는 ‘자기실현이나 자기 미래를 위해 당연히 그런 거 아니겠어요.’라고 뻔한 대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가 맹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고 그게 고스란히 부모의 욕망으로 틈입闖入되어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라 봐야 옳다. 그런 요구에 부응해야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내팽겨 쳐지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 지지해주지 않고 요구에 부응할 때만 자식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입시성적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이기에 학생들은 더욱 더 ‘마비’되어 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불인한 사람이 될수록 오히려 성공에 더 가까워지는 아이러니가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남을 짓밟고 이룩한 성공신화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하다. 계속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하는데, 그럴수록 자기 자신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의 괴로움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삶을 꾸린 사람은 그 이상의 괴로움을 맛보며 불운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방궁 같은 집이 있고 지위가 있다 할지라도, 누구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면 그런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인하면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지만, 결국 그 불인함 때문에 삶은 송두리째 뽑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명왕성』이 우리나라에선 등급심사를 받을 때, 영등위가 “주제ㆍ내용ㆍ대사ㆍ영상 표현이 사회 통념상 용인되는 수준이지만 일부장면에서 폭력적인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모방위험의 우려가 있는 장면 묘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청소년들에게 관람이 허용되지 않는 영화다”며 19세 이상 관람가로 심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를린 영화제에선 제네레이션 14플러스(14이상 관람가)였다고 하니 웃지 못할 일이긴 하다(결국 15세 관람가 중에도 더 폭력적인 내용이 많다는 반박자료를 내어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음). 『도가니』라는 영화가 아이들을 상대로 일어난 실화를 다룬 영화임에도 19세 관람가였던 것과 같다. 그건 곧 ‘청소년 관람불가의 현실을 청소년들이 직접 목격하며 살아내고 있다’는 뜻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현실에 대한 비판은커녕 영화의 폭력성과 주제만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19세 관람가의 세상이라는 게 아닐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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