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그런 사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태일의 유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태일의 삶 자체가 극도로 ‘나’만을 중시하던 시대에 ‘우리’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성공신화’를 좇던 시대에 ‘실패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 평화시장에 있는 전태일상.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룩한 경제발전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된 후, 극도의 이기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을 치던 때에 노동자들도 소외당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시장의 봉재공장에서 일하던 시다와 미싱사 보조 등은 사회의 약자로 자기 몸을 서서히 죽여가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공장이라 봐야 몇 평 되지 않는 공간에 널빤지로 위, 아래 공간을 나누어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 환기구도 없어 옷감에서 나오는 분진이 공장을 희뿌옇게 만들어놓았다.
여기서 어린 여공들은 14시간 일하고 당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벌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감이 밀릴 때엔 각성제까지 맞아가며 3일 밤을 꼬박 새며 일하기도 했다. 그런 극악한 상황이다 보니, 폐렴에 걸리거나 신경쇠약에 걸리더라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강제 해고를 당했고 억울하다는 한 마디 말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태일은 ‘바보회’를 조직하여 여공들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수밖에 없었다.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노동청에 제소해봤지만 그들은 기득권 카르텔Kartell을 형성하고 있어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 작업환경 따윈 중요하지 않다.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작업하기만 하면 된다.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의 정신으로
이에 1970년 11월 13일 기습시위를 하려다가 경찰에 제지당했고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기름을 온몸에 붓고 불을 붙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것이다. 과연 이 구호는 누구를 위한 구호였으며, 누구를 위한 행동이었단 말인가. 전태일, 개인을 위해서라면 재단사로 일하며 그와 같은 비인간적인 현실에 눈을 감았어도 됐다. 그러면 적어도 웬만큼 살만한 정도로 돈도 벌고 나름 인정도 받으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다들을 ‘남’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겐 ‘남’이라는 확연하게 그어진 인연의 분별선이 없었고 ‘나의 나인 그대들’이라는 동지의식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유언장의 글을 보자.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아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해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내 생애 못 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이 모란공원에 묻힌 지, 벌써 43년이나 흘렀다. 하지만 전태일이 이루고자 한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세상과 더욱 반대되는 방향으로 세상은 변해가고 있다. 그의 유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한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태일은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간직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성공신화’를 좇는 사람은 골방에서 외로움에 치를 떨며 서서히 죽어가지만, ‘실패의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은 모두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영원히 살아가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가 찾았으면 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나를 아는 모든 이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를 되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날카롭게 새겨진 자본주의의 상흔은 너무도 깊게, 그러면서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찾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모험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한 사람이 되지도 나 자신을 돌아보지도 못했다. 여전히 여행 내내 서로에게 상처를 줬으며,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친구를 깎아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과정일 뿐이다. 우린 이야기를 나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려 노력했다. 어찌 보면 매순간이 그렇게 나와 너를 제대로 보기 위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카자흐스탄 여행이 ‘나의 여행’이 아닌 ‘우리의 여행’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고, 이 여행을 다시 곱씹어 봄으로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를 되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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