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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서설 - 2. 인간 세계를 이루는 두 축, 예(禮)와 악(樂)①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서설 - 2. 인간 세계를 이루는 두 축, 예(禮)와 악(樂)①

건방진방랑자 2021. 9. 1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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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 2. 인간 세계를 이루는 두 축, ()와 악()

 

 

 

중국 고문헌으로 확실히 인정할 수 있는 시경서경

 

하지만 중국문명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각기 따로따로 경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육예(六藝)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중국의 문헌으로서 가장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시경(詩經)서경(書經)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복잡한 고증을 해야 하겠지만 시경(詩經)이라는 것은 원시적인 노래들의 모음(collection)입니다. 시경(詩經)은 선집의 형식(Anthological form)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문명(古文明)의 잔재를 상당히 분명하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사 내용은 약 B.C 700년경에 사용되었던 언어문자를 아주 순수하게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서경(書經)은 나중에 심각한 금고문 논쟁을 야기시키는 텍스트이긴 하지만 상당히 고문헌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논어(論語)에서 시서예악(詩書禮樂)’이란 말은 안 나오지만 시서(詩書)’, ‘예악(禮樂)’이란 말은 짝으로 잘 나옵니다(물론 詩經, 書經이란 말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논어(論語)라는 책은 중국문헌 중에서 가장 정통적 문헌입니다. 공자(孔子)라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내가 잘 모르겠으나 공자(孔子)라는 X가 있었다고 한다면 논어(論語)는 공자의 말을 그대로 기록해놓은 가장 믿을 만한(Authentic) 텍스트입니다. 물론 맹자(孟子)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오센틱한 텍스트죠. 그러므로 논어(論語)라든가 맹자(孟子)같은 문헌은 고문명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그런데 논어(論語)역경(易經)이라는 말이 나올까요?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역()이란 말이 하나 나오는데 이건 역경(易經)을 가리키는 글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역()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에 대해서는 논어(論語)에서 그 인용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공자가 인용하고 있는 시가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경(詩經)이라는 텍스트의 시하고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경(詩經)이라는 텍스트를 분명히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자라는 사람이 이해했던 역사적 해석방식에 따라 우리는 그 텍스트를 접근해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공자가 꼭 ()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요. 허나 논어(論語)에 나오는 예악(禮樂)’이라는 말은 대개 추상적(abstract)으로 쓰여 지고 있으며 어떤 구체적인 텍스트를 가리키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시와 서야말로 글의 전범 같다. 그게 인류의 문자 생활이었고 여태까지도 그렇게 쓰여 지고 있다.   

 

 

 

집단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예()

 

그러면 예악(禮樂)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산다고 하는 사회현상은 일종의 떼지어 살기(Grouping)입니다. 모여 산다고 하는 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질서(order)가 없을 수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군집 형태가 개미의 예입니다. 하숙집에서 방에 앉아 있다가 기어 다니는 개미를 살펴볼 때가 간혹 있는데, 이 짜식들은 엄청난 고에너지체 같거든요. 개미라는 것은 도대체가 신기해요. 그 사이즈가 얼마나 작습니까? 그런데도 기어 다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빠를 수가 없고 어떠한 물체를 물고 가는 걸 보면 그렇게 힘이 셀 수가 없어요. 개미의 몸체에 비한다면 개미가 뛰어다니는 속도는 벤 존슨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빠를 것이고 또 들어 올리는 힘은 전병관이가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낼 그런 정도로 쎈 거라고. 그런데 벤 존슨은 고작 100미터 가서 지치지만 이놈의 개미는 수천 킬로를 그렇게 가는데 그동안에 아무것도 안 먹어도 이 대장정을 거뜬히 치러낸다 이겁니다. 개미라는 것 하나만해도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개미는 촉각은 발달되었을지언정 도대체 후각이 발달되었을 것 같지는 않은 데도 꿀 묻은 컵을 놓아두면 수많은 개미가 몰려든다는 사실입니다. 그 넓은 천지에서 어떻게 나의 컵을 정확히 목표로 하고 몰려 올 수 있는지. 신비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예요. 이런 숙제를 어떻게 푸는가 하는 것이 나의 고민이죠.

 

그런데 이놈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엄청난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한 판단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개미는 여왕개미, 일개미 등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컴배트 같은 살충제를 놓으면 일개미가 그걸 물어다 여왕개미에게 먹여 몰살을 시키는데, 이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남미의 종교집단의 교주가 교도 모두에게 독을 먹여 죽인 사건과 비슷하죠. 그래서 나는 컴배트를 놓을 때 내가 엄청난 학살을 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개미가 여왕개미에게 일개미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예(, ritual)입니다. 일개미가 여왕개미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분명히 기능(function)과 역할(role)이 다 분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도와 문화를 분화(differentiation)시키는 것이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예()라는 한 측면만 있으면 인간사회가 유지되지 않아요. ()만 있으면 히틀러 사회나 개미사회로 가는 것입니다. 개미사회는 예()만 있고 악()이 없습니다. 그 녀석들은 노래를 못 부르잖아요?

 

 

 그래서 개미의 군집을 표현할 때 집단지성이란 말을 곧잘 쓴다. 무리가 하나의 몸인 것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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