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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26. 될 때까지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26. 될 때까지

건방진방랑자 2021. 9. 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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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될 때까지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그러기 위해선 박학(博學), 넓게 배워라; 그리고 심문(審問), 살피며 자세히 물어라;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고; 돈독하게 그것을 실천하라.
 
此誠之之目也. , 所以擇善而爲知, 學而知也. 篤行, 所以固執而爲仁, 利而行也. 程子: “五者廢其一, 非學也.”
이것은 성지(誠之)의 조목이다. ()ㆍ문()ㆍ사()ㆍ변()은 택선(擇善)하는 것으로 지고(知固)가 되니, ‘학이지지(學而知之)’. 독행(篤行)은 고집(固執)으로 인집(仁執)이 되니 리이행지(利而行之)’. 정자가 다섯 가지(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중에 그 하나라도 없다면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有弗學, 學之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배우지 않을 수는 있으나, 일단 배우자고 했다면 능하지 못하는 데도 그것을 놓지 말아라. 묻지 안을 수도 있으나, 일단 물었다 하면 그걸 잘 알지 못하는 데도 놓지 말아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막상 생각했다 하면 그것을 얻지 못하는 데도 놓지 말아라. 분변하지 않을 수 있으나, 분변하자고 했으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놓지 말아라. 행하지 않을 수 있으나, 한 번 행하자고 작정했으면 독실하게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것을 놓지 말아라. 이런 일에 있어서 남들이 한 번에 능한다고 하면, 백 번을 하고, 열 번에 능한다고 하면, 천 번을 하라.
 
君子之學, 不爲則已. 爲則必要其成, 故常百倍其功. 此困而知勉而行者也. 勇之事也.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다면 반드시 이루길 요구하기 때문에 항상 그 공부를 백배로 해야 한다. 이것은 곤이지지(困而知之)’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로 용()의 일이다.

 

 

유불학 학지 불능 부조야(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이거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중용(中庸)을 읽을 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인생을 결정했습니다. “배우지 않는 것은 좋다. 배우지 않는 것은 허물이 아니다. 배우지 않는 것이 있을지언정, 일단 배웠다 하면 능하지 아니 하면 그것을 손에서 놓지 말아라.” 인간이라는 게 일생 동안 굳이 학문에만 힘쓰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게 되는데, 그러나 일단 배우자고 작정을 했다면 능하지 않으면 그것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것은 원칙이어야 합니다. 나는 젊었을 때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내 인생의 원칙을 정했고, 또 그 원칙대로 실천했습니다. 내가 지금 한의대를 다니면서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이 중용(中庸)의 말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어렸을 때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게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유불문 문지 부지 부조야(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하고 대화를 할 때, 흔히 선생님을 머리가 나쁜 것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엉뚱한 질문을 잘하기 때문이예요. 나는 이해가 안 되면 계속 묻거든요. 그러니 나하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답답하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곤이지지(困而知之)’하는 놈이어서 무슨 말인지 모를 때는 계속 묻습니다. 그렇게 쉬운 것도 못 알아듣느냐고 핀잔을 듣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계속 묻는 데 대해서 창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요하게 계속 묻다가 보면 착 깨달을 때가 있어요. 나는 누구하고든 대화를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가 좍 빼내어 나오게 합니다. 근원적인 것을 철저하게 계속 묻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는 비록 대답을 잘 안 해줘도 착 감을 잡을 수 있어요. 그래서 확 잡아내야, 나는 대화를 끝냅니다.

 

 

유불사 사지 부득 부조야(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유불변 변지 불명 부조야(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명백하게 그것이 분변(分辨)이 될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중용(中庸)’이란 악착같습니다. 악착같아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동양사상은 두루뭉실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무슨 고상한 덕이나 있고어쩌고.” 웃기네! 어디 그런 덕이 있냐?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모든 덕()은 곧 꽁푸입니다. 동양사상에는 부드럽고 어쩌고 하는 애매한 덕성 따위는 없어요. “덕성을 함양하는 교육을 해야 하고 어쩌고, 전통적 인성교육과 세계화의 교육이 마찰을 일으켜서 복잡하다.”는 식의 이런 미친놈들의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데, 교육의 근본을 모르는 짓거리입니다. 동양사상은 명료합니다. 명료할 때까지 분변(分辨)하라!

 

 

유불행 행지 부독 부조야(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

여기까지가, 바로 앞 문장의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의 문제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죠?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딴 사람들이 한 번에 이것을 능하면 나는 백번 하라. 다른 사람들이 열 번에 그것을 능하면 나는 천 번 하라.” 그래야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것은 반복이다! 꽁푸는 반복이요, 반복 없는 꽁푸는 없다! 이 세상에 단 한 번에 얻어지는 꽁푸는 없다!

 

 

 

 

인용

목차

전문

본문

공자가어

도전할 용기를 준 단재학교

닉 부이치치가 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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