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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5. 취인이신(取人以身)과 공부론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0장 - 5. 취인이신(取人以身)과 공부론

건방진방랑자 2021. 9. 19.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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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취인이신(取人以身)과 공부론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따라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니, 사람을 취할 때는 몸으로써 하며, ()로써 몸을 닦고 인()으로써 그 도()를 닦아라.
 
此承上文人道敏政而言也.
이 장은 윗문장의 인도민정(人道敏政)’을 이어서 말하였다.
 
爲政在人, 家語爲政在於得人,” 語意尤備.
위정재인(爲政在人)’공자가어(孔子家語)위정재어득인(爲政在於得人)’라고 쓰여 있으니, 말의 뜻이 더욱 완비되어 있다.
 
, 謂賢臣. , 指君身. 道者, 天下之達道.
취인(取人)’에서 인()은 어진 신하를 말한다. ‘수신(修身)’에서 신()은 임금의 몸을 가리킨다. ()라는 천하의 공통된 도().
 
仁者天地生物之心, 而人得以生者, 所謂元者善之長.
()이란 천지의 살아 있는 생물의 마음으로 사람이 획득하고 태어나니, ‘()은 모든 선한 것의 으뜸이다라는 것이다.
 
言人君爲政在於得人, 而取人之則又在修身. 能仁其身, 則有君有臣, 而政無不擧矣.
임금이 정치를 함은 사람을 얻는 데에 달려 있고, 사람을 취하는 것은 또한 수신에 달려 있다. 그 몸을 인()하게 할 수 있다면 훌륭한 임금이 있게 되고, 훌륭한 신하가 있게 되니, 정치가 거행되지 않음이 없어진다.

 

고위정재인 취인이신(故爲政在人 取人以身)’

그 다음에 취인이신(取人以身)’이라는 말을 보면, 주자 주()에 이 ()‘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란 임금의 몸을 가리킨다[身指君身]사람을 취한다고 하는 것은 인재의 등용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임금의 몸(君身)을 가지고서 한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굳이 억지로 해석한다면, 사람을 등용하는 군주의 몸이 제대로 되어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자의 주()를 따르기 때문에 여기서 신()에 대한 해석을 군신(君身)으로 해버리고 말지만, 나는 이 신()이 군신(君身)일 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은 사람을 취할 때는 신()으로써 하라, 즉 그 사람의 몸으로써 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쓸 적에 등용의 기준을 내가 말하는 몸철학의 그 몸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통일론대강이라는 글에 나와 있는 교육론은 여러분들이 이 중용(中庸)강의와 결부시켜서 반드시 읽어 봐야 하는데, 중용(中庸)취인이신(取人以身)’이란 말은 내 교육론에서의 핵심인 공부론(工夫論)’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의 관점이 분명히 맞다고 생각해요. 동양인들이 생각한 공부(工夫, 꽁푸)란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몸이다!’라는 인간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도 그 물리적 조건에서 현현된(emerge) 것일 뿐이요, 인간 존재의 모든 가능성은 몸에 달려 있습니다. 몸을 단련시키는 게 곧 교육인 거죠. 이성이라는 것도 몸의 현상의 일부이며, 수학, 물리를 공부한다는 것도 몸의 현상의 일부로써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담배를 끊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작심(作心)을 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담배를 찾는 이유는 몸의 관성 때문인 것입니다. 동양인들은 몸과 마음을 이원론적으로 본 게 아니라, ‘()’의 문제는 몸을 콘트롤해야 제대로 잡힌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몸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제대로 콘트롤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성적 쾌락을 절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 절제의 과제도 몸의 단련의 문제인 것입니다. 섹스를 즐길 땐 완벽하게 즐기고, 단속할 땐 철저하게 단속하는 것은 몸의 단련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겁니다.

 

꽁푸는 기본적으로 위성지도(爲聖之道)’입니다. 성인(聖人)이 되어가는 길인데, 성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은 내 몸을 자유자재로 콘트롤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서원에 나오는 학생 하나가 중용(中庸)강의를 들으면서 무엇을 배우느냐는 물음에, 중용(中庸)을 공부하면서 건강이 좋아졌다고 대답하더군요. 몇 주 안 되는 기간에 건강이 좋아졌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만큼 깨달은 게 크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큰 깨달음이란 이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하다못해 밥을 먹을 때도, 속이 쓰리거나 아프다고 하면서도 더 쳐 먹는 놈들이 많아요. 못 먹어서 속이 쓰린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아프다고 하면서도 더 쳐 먹는 놈들이 있는데, 이건 크게 잘못하는 겁니다. 소화가 안 되고 속이 쓰리고 위에 헛 가스가 차거나 하면 위신경이 더 자극되고 흥분되기(irritation) 때문에 더 음식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먹지 말아야 하는데 기를 쓰고 먹어대니 악순환을 유발하게 되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발악적으로 먹게 되는 것이죠. 어떤 음식이든 몸이 받아들일 만하지 않은 음식은 입에 넣는 순간부터 콱 맥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 때, 내 몸에 맞는 음식과 안 맞는 음식은 몸이 말해 주거든요.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무시한단 말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식을 하면 안 돼요! 더 먹고 싶다고 생각될 때 숟가락을 놓으라고 하는데 어떤 놈이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느냐 그 말이야! 말이야 좋지!

 

포재방책(布在方策)’이라, 방책에는 다 쓰여져 있지만 실행하는 사람이 드물단 말이지. 음식이 좀 맛있다 싶으면, “! 내가 요새 하숙밥 먹느라고 좀 부실했는데 많이 먹어두면 좋지 않겠느냐?”하고 순간적으로 속아버린다고. “야아, 이런 진수성찬 언제 다시 만나랴, 일단 먹어두자! 소화제도 좋은 게 많은데 혹시 과식을 해서 배가 띵띵해지고 거북하게 되면 소화제로 해결하지 뭐, 먹자 먹어! 먹는 게 남는 거다!” 어떤 경우에도 과식을 한 나머지 소화제를 먹어 몸에 좋은 경우는 이 천지간에 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과식하는 순간 몸에 마이너스가 되기 시작하며 결국에는 구체적인 피해가 몸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이런 지극히 상식적이고 단순한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니 참 피곤한 동물이죠? 나도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 같으니 말이죠! 평생을 위장이 쓰리다고 하면서도 계속 쳐 먹어 댔으니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물인가? 안 쳐 먹었으면 간단히 바로 잡혀졌을 텐데 말입니다··· 쯧쯧쯧.

 

중용(中庸)’이란 꽁푸(Kung fu)이고, 참는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끊을 수 있는 용기(뒤에 ··에 대해서 나온다)인 것이죠. 이것은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이 아닙니다. 명상(meditation)이니 초월명상(trancendetal meditation)이니 라즈니쉬의 뭐니 어쩌고 하는 것들은 다 부질없는 짓들입니다. 라즈니쉬 같은 놈들은 내가 보기엔 좀 뭔가 잘못된 놈들 같아요. 핵심을 파악하는 듯하면서도 구체성이 없거든요. 공부란 마인드 콘트롤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피지칼 콘트롤(physical- control)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몸의 단련, 수신(修身)입니다. 사람을 쓸 적에는 당연히 딱 몸을 봐야합니다. 내가 만약 사장이라면 사원을 채용할 적에 몸을 보고 채용할 것입니다. 우선 걷는 폼부터 볼 것입니다. 척 몸을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취인이신(取人以身)’이라고 하는 말은 등용되는 당사자의 몸을 가지고 해석해 들어가야지 더 리얼하며, 그 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상으로 봐도 그렇게 해야 옳습니다. 주자의 해석은 좀 억지해석이고 부분적인 미스라고 생각합니다. ‘취인이신(取人以身)’()’은 그 사람의 몸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수신이도(修身以道)’ 그렇다면 그 사람은 몸을 닦아야, 수신()을 해야 하는데, 수신은 뭘로 하느냐? 몸을 닦는 데에는 길이 있으니, 무리하게 안 되는 것입니다. 걷는 데에도 다 길이 있거든요. 걸을 때 발과 팔은 서로 엇갈려서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은 허()한 공간을 팔과 다리가 서로 채워 주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무술과 무용의 원리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여기에 관련된 내용은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를 보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무술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에는 걸음(walking)의 길()이 깔려 있습니다. 상대방이 공격할 때는 반드시 나의 ()’를 공격해 오지, 손을 내뻗어 있는 ()’한 곳을 치고 들어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걷는 데도 길이 있듯이 몸을 닦는 데는 반드시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수신은 아무렇게나 되는 게 아니라 도를 따라서 터득해야 됩니다. 수신에는 반드시 그 길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도이인(修道以仁)’ 이게 중요한 말입니다. ()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지난번에 논어(論語)를 강의할 적에 ()이란 센시티비티(sensitivity)’라고 했습니다. ‘불인(不仁)’하다는 것을 한의학적으로 말할 때 마비되었다(以手足痿痹爲不仁)’라고 풀이하는 걸 봐도 알 수 있듯이, 동양 사람들이 인()하다고 하는 것은 센시티브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라고 하는 것이 관대하고 점잖다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천만에 말씀이예요. ()이란 민감성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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