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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중용장구서 - 6. 도심으로 인심을 통제하라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중용장구서 - 6. 도심으로 인심을 통제하라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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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장구서 6. 도심으로 인심을 통제하라

 

 

 

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이 두 가지는 방촌지간에 마구 섞여 있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모른다면,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로와지고 미미한 것은 더욱 미미해 져서, 그 결과 하늘의 보편적인 질서가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길 방도가 없어지게 된다.

 

천리지공(天理之公)은 주자의 최대 관심사인데 그것은 보편적 도덕 가치(ultimate moral principle)를 말합니다. 만약 천리지공(天理之公)이 인욕지사(人欲之私)를 이기지 못하고 거기에 매몰되어 버린다면 그 결과는 비도덕과 무질서의 카오스일 뿐입니다. 위 문장을 통해 우리는, 주자가 당대의 사회문제의 원인이 인욕지사(人欲之私)가 천리지공(天理之公)을 억누르고 있는데 있다고 규정하고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자학의 근본 목적이자 핵심적인 가치인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한다[存天理去人欲].’이라는 게 노불(老佛)을 밀어내고 그 시대에 널리 펼쳐지도록(prevail) 하는 것이 주자의 궁극적 관심이었습니다.

 

기실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천리지공ㆍ인욕지사의 두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청소년 문제고 성수대교 붕괴 문제고 하여튼 신문지상에 나오는 모든 문제가 바로 이 천리지공(天理之公)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하는 관심과 의식이 결여된 나머지 발생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런 기초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인간사를 너무 팬시(fancy, 화려한)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너무 현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컴퓨터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무슨 스타워즈식 공상과학의 세계가 금방 다가올 것처럼 얘기하지요.

 

엊그제는 또 실내 장식을 하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는데, 도무지 요즘의 경향은 너무도 명백한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biological condition of man)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실내장식이 아무리 기가 막히게 현란하고, 무슨 레이저가 지랄발광을 한다 해도 거기에 온갖 신나고 편리한 건 다 해놓았다고 해도 사람이 그 속에서 하루만 살아도 뒈진다고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문명은 인위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문명의 주체인 인간은 최후의 자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몸의 구조란 게 최소한 일만 년은 지나야 변하는데, 그 변화란 것도 극히 미미합니다. 최근 일만 년의 변화라고 해봤자 겨우 사랑니가 퇴화되는 정도예요. 만년 동안의 시간에 걸쳐서 구강의 저작의 형태가 바뀌고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에 따라 DNA가 바뀌는 것이죠. 하물며 몇 십 년 사이에, 아니 몇 만 년이 흐른다고 해도 레이저에 마구 쏘여서도 안 죽을 수 있는 정도의 진화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서원에 이렇게 앉아서 공부하는 걸 고리타분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이 게임의 승부는 명백해요. 하늘이 명()하는 걸 성()이라고 할 때, 천리지공(天理之公)을 떠나 인욕지사(人欲之私)를 마음대로 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이란 걸 보고 있으면 인욕지사(人欲之私)가 천리지공(天理之公)을 무시하고 치닫는 경향이 강하지요. 편리함만 좇아가요. 그런데 그 편함이 인간의 본성을 망가뜨린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이 뒈지는 길 밖에 없어요! 첨단 과학이고 뭐고 말짱 헛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소박하게 살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문명은 자꾸만 잡스럽게 치닫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고 마구 까불어 대기만 하는 거죠.

 

여러분, 과학문명의 선진국일수록 자연을 존중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그 무한한 자연을 보세요. 그들의 삶이 첨단을 걸을 것이라는 예상은 환상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상적 삶의 모습을 가장 원시적으로 소박하게 해놓고 살고 있어요그러나 그들의 도시 삶은 잡스럽기 그지없다. 에너지 소비양식 하나만 보더라도 그 극한적 잡스러움이 쉽게 직감된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도 심각한 반성을 촉구하는 한심한 작태로 보느냐, 아니면 선망의 대상으로 부러워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파국의 경계선상에서 그 방향을 달리할 것이다. 1993년 현재,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25.2%(이 비율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ㆍ대양주 국가들의 총 소비 비율 24.4%를 넘는 것이다)를 미국이라는 거대한 공룡 단 한 마리가 먹어치우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문명을 잡스럽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만약 현대문명의 취약한 점이 문제가 된다면 대한민국 같은 나라가 가장 먼저 망할 수 있다는 섬뜩한 느낌을 제발 가져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세상을 넓게 보는 때가 오면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

 

 

 

, 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 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
정미(精微)로운 감각이 있으면 도심(道心)ㆍ인심(人心) 둘 사이를 잘 살펴 이들이 섞이지 않게 되고, 하나로 전일하게 되면 본디 마음의 올바름을 지켜 그 하나됨이 떠나지 않게 된다.

 

불리부잡(不離不雜)은 근세 유학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개념입니다.

 

 

從事於斯, 無少間斷,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이 일에 마음으로 종사(to engage)하는 것이 잠시도 끊임이 없고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하여금 늘 몸뚱아리의 주인이 되게 하고 인심(人心)이 매 순간 도심(道心)의 명령을 듣게 하라.

 

역시 도심(道心)이 인심(人心)을 부려야 건강하게 되죠. 밥 먹을 때도 그래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있어도 도심(道心)은 적정량을 알기 때문에 이제 그만 먹으라고 명령하지만, 인심이란 놈은 에이 좀 더 먹어두는 게 좋지 뭐, 먹는 게 다 살이 되는 건데하고 위안하면서 계속 먹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돼? 설사지 뭐야! 밑으로 그냥 좌악 빠지는 거야! 그러면 그때 가서야 인심(人心)을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 정도에서 그만 먹었어야하는 건데하는 거죠. 이게 인간존재의 아이러니컬한 문제요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주자는 불교에서 따온 이원적 인식론을 갖고 있다고 까는 사람도 있지만, 잘 이해하고 보면 주자가 그렇게 엉성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동양학하는 사람들 중에 리버럴(liberal)하다는 사람에게는 주자가 아주 나쁜 놈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실한 노력에 따른 정확한 판단이 아닙니다. 주자의 원의(原義)를 원래 맥락에서 파악할 줄 알아야 해요.

 

 

 

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그러면 위태로운 자는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것은 드러나게 되어 움직이고, 멈추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저절로 지나치고 모자람의 차이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책상의 다리 끝부분에 덧댄 나무가 각이 져 있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면 장판이 찢길 수도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저기 창문에 달린 차양막도 기울어지지 않게 수평으로 만든 뒤에 반듯이 올리고 내려야지, 휘어진 상태에서 하면 기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물건을 다루더라도 그 기능과 성질을 확실히 알고 난 다음에 다뤄야지, 그렇지 않으면 물건의 본래 모습을 상하게 하기가 쉬워요. 잘 모르면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벌써 늦게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9시에 시작한다면 적어도 850분엔 다 나와 있어야지! 이렇게 무슨 학원 다니듯이 마음대로면 강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서원에 다니는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야 해요. 배움에 뜻을 두고 한 달간의 시간을 할애했다면 서원에서 제시하는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6년간 이 나이에 아침 9시에서 저녁 6시까지 한의학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절한 고행이예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의대에 적()만 올려놓고 딴 짓 하는 걸로 오해하는데, 점심시간 1시간 빼고는 하루 8시간을 꼬박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돼요. 그리고 한의학 강의가 그렇게 재미있질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8시간을 공부한다는 게 보통 고문이겠습니까?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죠. 원광대 한의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수업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가장 출석률이 높은 사람이예요.

 

거기 비하면 여러분 나이에 9시에서 1시까지 이렇게 앉아서 공부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이 정도가 어려워서 결석하고 시간을 못 맞춰 지각이나 한다면 말이 됩니까? 사람이 한번 입지(立志)를 했으면 끝까지 지속하는 끈기가 있어야지. 젊은 시절에 그러한 몸의 훈련(discipline)을 익혀야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의 삶에 훌륭한 자산이 되요. 어떤 모임이든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것 자체가 인생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의 방책은 없어요. 그런데 한번 빠져 버릇하면 자꾸만 변명(excuse)꺼리가 생깁니다. 사람 사는데 무슨 일이 없을 수가 있나요? 그렇게 변명이 늘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모든 일에 변명만 다는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등록금을 10만원이나 내고 다니는 서원, 어차피 그게 자기 돈도 아닐 텐데, 시간을 정확히 지키세요!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는 습관도 들이고. 그런 걸 지키지 못한다면 중용(中庸)을 배운다고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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