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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해제 - 2. 똥 누기와 중용적 삶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해제 - 2. 똥 누기와 중용적 삶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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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2. 똥 누기와 중용적 삶

 

 

善讀者, 玩索而有得焉, 則終身用之, 有不能盡者矣.”
잘 읽는 사람이 완색하여 얻음이 있으면 죽을 때까지 그것을 써도 다할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중국말의 선()이라는 말은 누누이 얘기했듯이 서양말의 굿(good)’이 아니고 (well)’과 같은 말로 무엇을 잘한다는 뜻이고, 완색(玩索)의 완()가지고 논다는 뜻입니다. 장난감을 완구라고 하듯이 문장도 맛이 있으니까 갖고 놀아야 됩니다. 여자의 몸처럼 요기조기 만지고 살피면서 음미하면 그 맛이 무궁무진하다는 거죠. 제대로 읽은 사람은 그렇게 리얼하게 느끼고 얻는 게 있죠. 이것이 실학입니다.

 

종신(終身)은 죽을 때까지라는 뜻인데, 중국 사람들은 결혼을 일컬어서 죽을 때까지 치루는 일 가운데서 가장 큰 일이라고 해서 종신대사(終身大事)’라고 합니다. 중용(中庸)은 그 맛이 무궁무진해서 그것을 얻어 자기 일상생활에 적용해도 끝이 없다는 뜻인데 맞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중용(中庸)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영원한 이상(ideal)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지칠 수가 없고 피곤할 수가 없고 싫증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 동양문명이 중용(中庸)이라는 고전을 택한 것이 얼마나 현명했던가를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다할 수 없다[不能盡]’는 말은 어떠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발전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발전이란 것을 앞의 그림에서와 같이 사선으로 나타내면 이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 밖에 어떤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서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할 때, 서울대학이라는 목적이 여기 내 인생 밖에 뚜렷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향해서 매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위와 같이 직선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배가 고플 때는 많이 먹고 배가 부를 때는 적게 먹는 것, 너무 많이 먹으면 체하니까 항상 알맞게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들은 아주 단순한 문제이지만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갈 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용(中庸)적 사고방식에 있어서는 항상 그 목적성과 표준(criteria)이 전개과정 자체에 내재해 있어요. 직선에 있어서는 목적성이 항상 초월(transcendence)해 있어서 그곳을 향해서 달려가는 묵시록적(apocalyptic) 역사관을 낳게 되며, 그런 묵시록적 역사에는 종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중용(中庸)적 사고방식은 모든 리듬(up and down)에 내재하는 평형(equilibrium)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은 위에 나온 부진(不盡)ㆍ무궁(無窮)과 같이 영원(endless)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인류가 특히 헤브라이즘에 근원한 서양의 사람들은 이 내재성(immanence)을 역사의 목표로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초월적인 목표는 항상 저 밖에서 빛나는 태양처럼 잘 보입니다. 만인 위에 하나님이 우뚝 솟아 계셔서 본을 보이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찬란하며 실천하기도 쉬워.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중용(中庸)을 지키는 것은 매우 시시한 것 같이 보이지만 더 없이 중요한 것이고, 살다보면 초월성(transcendence)보다 내재성(immanence)이 훨씬 더 어렵고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되죠.

 

나는 아침에 똥 눌 때 그것을 가장 잘 느낍니다. 매일 아침 똥이 기분 좋게 싹 빠지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침에 똥이 기분 좋게 싹 빠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전날 하루를 정말 완벽하게 살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전날까지 아무렇게나 산 사람은 똥을 쑤욱 하고 맛있게 쌀 수가 없는 거예요. 아침에 똥이 나오는 형태를 보면 깨질깨질 빠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딱딱하게 변비가 되어 토끼똥처럼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딱딱하다가 픽 물러지기도 하고 아주 개판이거든요. 금색처럼 누리끼리한 똥이 흰 떡가래처럼 쫘악 빠지다가 끝에 가서 밑을 닦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삭 빠지는 것이 최고의 똥입니다.

 

그런데 이 똥을 완벽하게 누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이상입니다. 나는 10년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가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삶의 목표가 교회라는 내 삶의 밖에 명백하게 있으므로, 의지만 있으면 실현이 됩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완벽한 똥을 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중용(中庸)이라는 개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10년 동안 완벽하게 똥을 누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앞에 가서는 절해야 합니다. 그 사람 얼굴은 광채가 안 날 수가 없어요. 성철(性徹, 1912~1993)은 저리가라죠. 성철도 절대로 그렇게 똥을 누지 못했습니다. 사리가 그렇게 많이 나왔다는 것은 불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얘기죠. 고승(高僧)일수록 사리가 안 나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효봉 스님은 사리가 안 나왔을 것입니다.

 

똥을 완벽히 누는 것이 어떻게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겠는가? 이거 도대체 찬란하지가 않거든요. 여기서부터 여러분들의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됩니다. ‘나는 노벨상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라고 하면 찬란하지만, 중용(中庸)이라는 학문에 입문하면 찬란함이 없습니다. 미적지근하고 보이지 않으며 어디에 가서 숨어있는지 잘 몰라요. 일상생활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그 도를 찾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중용(中庸)이라는 학문에 제대로 입문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역사의 목표는 묵시론적 휴거가 아니라 그 역사가 끊임없이 똥을 잘 싸는 것이 아닐까요? 자아! 이제 중용(中庸)의 제 1,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박석무 선생님의 다산 강의도 흥미롭고 실학에 대한 도올 선생님의 열변도 재밌다. 좋은 강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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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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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공생의 필살기와 똥 누기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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