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오월묘지엔 특별한 사람들의 묘지도 함께 있다.
6.10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묘지가 바로 이곳에 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정문에서 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류탄에 머리를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7월 9일에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으로 진행되었는데, 추모 인파만 서울에서 100만, 광주 50만 등이었다. 이를 계기로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 이한열 열사의 묘지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
꾸며질 때, 과거는 사라진다
구오월묘지는 그나마 5.18 당시의 느낌을 전해주는 곳이었다. 신묘역은 너무 잘 꾸며져 삶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구묘역에선 슬픔과 통곡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난 잘 꾸며진 곳에선 어떤 역사성을 느낄 수가 없다. 그건 ‘현재의 이미지로 덧칠해진 과거’일 뿐이라는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정돈한다는 핑계로, 오히려 역사의 의미를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정돈되지 않고 들쭉날쭉한 곳에 진짜 역사가 살아 숨 쉬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체를 묘지에 묻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었던 그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구오월묘지는 5.18을 기억하려는 사람이라면 꼭 찾아가야 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
현재를 살려는 자, 이 비를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구오월묘지로 들어가는 입구엔 특별한 비석이 묻혀 있다. 이 비석을 밟고 지나가야만 오월묘역을 참배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맘 같아선 힘껏 밟고 싶었지만, 해설사분이 요청하신다. 그렇게 밟고 지나가면 어느새 새겨진 글씨는 없어질 것이고, 그러면 역사는 묻히고 마는 것이니 “김소월시에 나오는 것처럼 사뿐히 즈려 밟고만 지나가세요.”라고 말이다.
이름하야 이 비석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기념비’다. 그 땐 대통령이 지나간 모든 곳이 ‘하해와 같은 은총을 받은 곳’이었다. 오죽했으면 민박했다는 것조차 기념해야할 일이었을까.
▲ 세상에 이런 걸 기념비로 만드는 정신상태가 매우 궁금하다.
하긴 ‘땡전뉴스’는 그런 관념의 극단이 아니었나. 남한 전역이 가뭄의 피해를 입고 있던 때, 전두환 대통령이 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비가 왔다며, 그에게 신적인 권능을 덧씌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조선일보』는 ‘단군이래 성군聖君’이라며 칭송하기도 했다.
▲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는 순간, 조선일보는 새 시대에 맞는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민박 기념비를 세운 것이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한국의 20세기는 중세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혼란의 세기였던 것이다. 과거를 기억한다는 건, 현재를 새롭게 쓰려는 의지다. 현재를 새롭게 쓰려 한다면, 이 비를 ‘즈려 밟고’ 가야만 한다.
민족의 반역자요 광주민중 학살과 자주 민주 통일의 원흉 전두환이 자기 죄를 은폐 하고자 학살현장인 광주를 방문하지 못하고 1982년 3월 10일 담양군 고서면 성산 마을에 침입하여 민박 기념비를 세웠다. 이에 복받쳐 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참을 수가 없어 1989년 1월 13일 이 비를 이곳에 묻었나니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곳을 짓밟아 통일을 향한 큰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영령들이여! 고히 잠드소서! 1989년 1월 13일
비를 사뿐히 지려 밟고 묵념을 하며 원혼들에게‘당신들이 뿌린 피와 땀 위에 내가 섰노라. 어찌 내 삶이 나만의 것일 수 있으랴.’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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