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의 도입
그런데 이 자유의지론에 누구보다도 정약용이 강한 호기심과 관심을 표명했지요. 기존의 전통적인 유학자들은 의지라는 말을 본성을 따르려는 수양 공부에 적용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리치의 경우처럼, 자유의지 작용이 없으면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부를 수 없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같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유학에서 측은지심이란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선천적 성향을 의미합니다. 리치의 관점에 따르면, 어떤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저절로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은 결코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주체의 의지적 선택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학자들은 당연히 이 측은지심이야말로 선한 마음의 대표 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약용은 리치의 입장에 가까운 태도를 취합니다. 그는 저절로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느끼는 것은 마치 불길이 타오르고 샘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아서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적극적 노력을 통해 선을 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매번 악을 지을 때마다 한쪽에서는 욕망이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밝게 저지하는 것은 곧 본성이 부여받은 바의 천명이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라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악이 섞여 있다는 설명의 경우, 만일 하늘이 성(性)을 이와 같이 부여했다면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고 불이 위로 타오르는 것과 같아서 우리의 공(功)이라고 하기에 부족하게 된다.
每遇作惡 一邊發慾 一邊沮止 明沮止者 卽本性所受之天命也 天命之謂性 非是之謂乎 若所謂善惡渾者 天之賦性旣如此 則人之行善 如水之就下 火之就上 不足爲功能
매우작악 일변발욕 일변저지 명저지자 즉본성소수지천명야 천명지위성 비시지위호 약소위선악혼자 천지부성기여차 즉인지행선 여수지취하 화지취상 부족위공능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어서 선을 원하면 선을 행하게 하고 악을 원하면 악을 행하도록 했다. (선악이) 변동되어 확정되지 않았으니, 그 선택권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이것은 짐승에게 확정된 마음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것은 진실로 자신의 공이 되고, 악을 행하게 되면 그것은 진실로 자신의 죄가 된다. 이것은 바로 마음의 선택권(權衡)이지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이 아니다. 『맹자요의(孟子要義)』 1 : 34
故天之於人 予之以自主之權 使其欲善則爲善 欲惡則爲惡 游移不定 其權在己 不似禽獸之有定心 故爲善則實爲己功 爲惡則實爲己罪 此心之權也 非所謂性也
고천지어인 여지이자주지권 사기욕선즉위선 욕악즉위악 유이부정기권재기 불사금수지유정심 고위선즉실위기공 위악즉실위기죄 차심지권야 비소위성야
위의 인용문에서 ‘자유로운 선택권’이라는 표현은 정약용이 ‘권형(權衡)’이라고 부른 것을 의역한 것입니다. 권형이란 원래 저울을 뜻합니다. 옛날에 사용한 저울은 보통 가운데 중심추를 놓고 양옆에 기준이 되는 물건과, 무게를 잴 또 다른 물건을 놓아서 서로 균형을 맞추는 도구이지요. 정약용은 저울의 이미지를 통해 옳고 그름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한 권형의 능력이란 두 가지 대립적 갈등 속에서 하나를 선택할 줄 아는 윤리적 결단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살펴본 인심과 도심의 경우, 두 마음 가운데 도심의 마음을 선택해서 따르는 작용을 권형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약용의 권형 개념이 리치의 자유의지에 가깝게 된 것은, 그가 권형의 작용 없이는 본성의 선함이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 때부터입니다. 아무리 천명지성이 선하고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주체적인 윤리적 행동으로서의 선함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그가 본성의 선천적 선을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약용은 선의 가능성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면서, 반드시 부여받은 본성 외에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권형의 능력이 함께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강조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저절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끼더라도 반드시 구체적인 행사의 영역에서 노력을 거듭해야 비로소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매번 우리의 의지를 통해 측은지심을 다시 선택하고 또 확충해나감으로써 인간은 윤리적으로 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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