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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3부 뿌리② -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또 하나의 영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또 하나의 영웅

건방진방랑자 2022. 1. 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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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영웅

 

 

이제 로마인들은 정면 대결에서 카르타고군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특히 한니발이라는 이름은 자는 아이도 깨울 만큼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만약 한니발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탈리아 전역을 접수했다면 훗날 유럽 대신 북아프리카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유럽 문명은 없었을 테고……. 그런 사태를 방지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한니발은 애초부터 로마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 그의 목표는 로마를 제압하는 정도에서 카르타고와 로마가 공존하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둘째, 설사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킬 의도가 있었다 해도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로마의 주력군을 궤멸시켰지만 여전히 방어망이 강력한 로마의 도시들을 빼앗을 힘은 없었다. 특히 로마 주변 중부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은 여전히 로마에 대한 신뢰를 지키고 있었다. 셋째, 로마는 아직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2년 동안 이탈리아를 유린했어도 아직 카르타고 본국에서 지원군이 이탈리아로 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칸나이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10년이 넘도록 한니발은 로마군과 대치하면서 소모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마케도니아와 연합 전선을 이루는 데 성공했지만 카르타고 본대가 오지 않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원정 전에 한니발은 동쪽의 마케도니아, 남쪽의 카르타고 본대와 협공해 로마를 삼면으로 압박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는 제자리걸음의 기간이었지만 로마에는 권토중래의 발판을 마련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로마에서도 영웅이 탄생했다. 기원전 210년 로마는 스물다섯 살의 야심 찬 젊은이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기원전 236년경~기원전 184)에게 에스파냐 원정군을 맡기는 모험수를 던졌다. 과연 승부수가 통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개인적 우상이던 한니발의 초승달 포진을 모방해 카르타고 최대의 속주인 에스파냐를 5년 만에 정복하고 개선했다. 전황은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로마의 함선 한니발에게 무너진 로마가 힘을 회복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해군 덕분이었다. 한니발 군대가 10년 이상이나 로마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마 해군은 카르타고 본국의 군대가 지중해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전쟁은 정복군에게 불리한 장기전으로 바뀌었고 로마는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으니, 일등공신은 로마의 함대였다.

 

 

때를 틈타 로마 원로원은 총공격을 주장했으나 스키피오의 생각은 달랐다. 한니발의 전술로 한니발의 출발점인 에스파냐를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한니발이 했듯이 카르타고 본토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적을 영토 내에 두고 적의 본토를 친다는 것은 과감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그 모든 게 해상을 로마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로원의 불신에 찬 시선을 뒤로하고 스키피오는 기원전 204년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했다. 스키피오의 전략은 적중했다. 1년에 걸쳐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토를 유린하자 마침내 한니발도 더 이상 이탈리아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불을 지른 스키피오와 불을 끄러 온 한니발, 기원전 202년 두 영웅은 카르타고 부근 자마의 평원에서 숙명의 결전을 벌였다. 양측의 병력은 엇비슷했으나 한니발의 기병은 스키피오의 절반 수준이었다. 바로 이 점이 자마 전투의 승패를 갈랐다. 기병의 열세로 초승달 포진을 구사할 수 없게 된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로 대체했다. 그러나 로마의 도시들을 정복할 때 유용했던 그 비장의 무기는 초승달 포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스키피오는 코끼리 부대에 대비해 나팔을 준비해두었다. 로마군의 요란한 나팔소리에 코끼리들이 혼비백산하면서 초승달 포진은 무너졌다. 로마에서 16년간이나 싸운 베테랑 전사들이 최후의 전투에 나섰으나 로마 기병들이 카르타고 기병들을 물리친 다음 전투에 합류하자 승부의 추는 일거에 로마 측으로 기울었다.

 

2차전의 승부로 로마와 카르타고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평화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로마는 카르타고의 무장을 해제했고,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금지했으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마저 물렸다.

 

그런데 3차전은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로마의 잔인한 확인 사살이었다. 카르타고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어놓고도 로마는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만큼 카르타고는 꿈에서조차 지워버리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런데 꿈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현실에서는 지워버리는 게 가능하지 않은가? 로마는 이 기회에 카르타고를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릴 음모를 꾸몄다.

 

더 이상의 전쟁은 해봤자 뻔한 승부였다. 단지 전쟁의 구실만 필요했던 로마는 그 구실마저도 만들어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인접국인 누미디아를 부추겨 카르타고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약에 따라 카르타고는 타국과의 전쟁 금지라는 조항에 묶여 있었으니, 누미디아의 공격은 공격이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웠다. 고문에 못 이긴 카르타고가 호신용 칼을 빼든 것은 3차전(기원전 149~기원전 146)의 구실이 되었다.

 

로마의 공격은 잔인했다. 카르타고의 전 시민은 필사적으로 최후의 방어전을 펼치고는 장렬히 전사했다. 로마군은 살아남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았다. 그리고 카르타고 성을 완전히 부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로마 제국은 그렇게 피 구덩이 속에서 자라났다.

 

 

카르타고의 흔적 카르타고의 중요 도시 중 하나였던 비르사의 유적이다. 카르타고의 재기를 두려워한 로마는 카르타고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지금도 그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 유적은 현재도 계속 발굴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유적인지 흔적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들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서부를 향해

예상 밖의 승리

영웅의 출현

또 하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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