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서부를 향해
정복이라고 하면 대개 국가적인 정책의 소산이다. 칭기즈 칸의 중앙아시아 정복,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개척 등등 인류 역사에서 대표적인 정복 활동들은 모두 예외 없이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층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로마의 경우는 다르다. 로마의 정복 활동은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 국민적지지’ 속에서 전개된다. 왜 그럴까? 리키니우스 법에서 보듯이 식민지를 획득해야만 평민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에 영토 확장은 단순히 국력을 키우는 의미만이 아니라 생존과 존속을 위한 것이었다. 제국으로의 팽창은 모든 로마인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필연적인 노선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영토 확장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로마의 식민시는 그리스의 식민시와 질적으로 달랐다. 그리스의 식민시들은 건설 주체들이 주로 경제적인 동기(무역)에서 스스로 모국인 그리스에서 나와 자발적으로 형성했다. 그러므로 모국의 정치적 간섭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물론 때로는 모국을 능가하는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시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설되었으며, 영토 개척을 통해 과잉 인구를 이주시킨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강했다. 따라서 그리스 식민시처럼 경제적인 동기보다 전략적인 의미가 더 컸다. 그리스의 식민시들이 주로 항구에 집중된 데 비해 로마의 식민시들은 내륙에 많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그점을 보여주는 예다.
또한 그리스의 식민시들은 무역을 통한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만 모국과 연관을 맺었으나 로마의 식민시들은 정치적ㆍ군사적으로 모국과 분리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는 새로 개척한 식민시들을 잇는 거대한 도로망을 구축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길이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아피아 가도다. 이 도로는 남쪽의 브룬디시움(지금의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어 로마 영토의 등뼈를 이루었다. 또한 북쪽으로는 아리미눔(지금의 리미니)까지 플라미니우스 가도가 건설되었고, 이것이 다시 플라켄티아(지금의 피아첸차)로 연장되어 아이밀리우스 가도를 이루었다. 오늘날 이탈리아 도로망의 골간은 무려 200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이다. 도로의 주요 목적은 군대와 보급 물자의 수송에 있었으니, 여기서도 제국의 면모는 뚜렷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싹이 드러나기 시작한 ‘로마 제국’ (정치 체제상으로는 아직 제국이 아니다)은 동양식 제국,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 중국의 한 제국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식민지와의 관계가 중국처럼 수직적인 구조를 취하지 않았다. 로마와 식민지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라티움 동맹의 정신을 따르고 있었다. 물론 로마의 리더십은 당연했고, 로마와의 친소 관계에 따라 대우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든 식민시에는 로마의 동맹시라는 동등한 자격과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이것이 곧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라는 로마식(서양식) 제국의 원리인데, 이를테면 군사권과 외교권은 로마에 있고 식민시의 자치권은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 로마의 고속도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 아피아 가도 같은 로마의 도로다. 로마인들은 새로 개척한 도시와 거점들을 잇는 방대한 도로망을 건설해 장차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이 아피아 가도의 일부는 오늘날에도 도로로 사용되고 있으니 아주 실용적인 유적인 셈이다. 로마 시내를 관통하는 부분은 돌 벽돌을 수직으로 박아 넣어 특히 견고하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자 로마는 자연히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도 바깥의 지중해 세계의 사정은 로마가 반도 내에 머물 때와는 크게 달랐다. 반도를 통일할 때도 만만찮은 적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무주공산을 놓고 여러 세력이 다툰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는 이미 구획이 정해져 있었고, ‘임자’가 있었다. 더구나 그 임자는 그 전까지 로마가 상대해온 적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지중해 세계는 동부와 서부의 둘로 나뉘었는데, 마침 이탈리아 반도는 그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동쪽으로 갈까, 서쪽으로 갈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동부 지중해는 문명의 빛이 발원한 곳이자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이었고, 당시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이집트의 헬레니즘 3강이 지배하는 헬레니즘 세계였으므로 신출내기 로마가 언감생심 끼어들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로마는 신흥 시장으로 떠오르는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로마로서는 버거운 상대가 버티고 있었다. 바로 카르타고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에 페니키아의 식민시로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식민시가 으레 그렇듯이 카르타고 역시 모국인 페니키아와 무관하게 발달했으며, 페니키아가 페르시아에 통합된 이후에는 그나마 모국마저 없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카르타고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인 이점 덕분이었다. 동부 지중해의 많은 페니키아 식민시들은 일찌감치 페르시아나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에 정복되었으나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지금의 튀니스 부근)에 있었으므로 유럽과 아시아를 휩쓴 정복의 물결을 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에는 드넓은 미개척 시장이 있었다. 남들이 다 하는 일에 뛰어들면 잘해야 경쟁자들과 시장을 균분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면 시장 독점이 가능하다(물론 그만큼 위험도 크지만), 기원전 4세기 이후 헬레니즘 세계로 통합된 동부 지중해는 전통적인 무역 도시들로 이미 만원 사례였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서부 지중해 세계의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특히 에스파냐(에스파냐란 원래 ‘먼 나라’라는 뜻으로 페니키아인들이 붙인 이름이었고, 로마 시대에는 히스파니아로 불렸다)는 날로 커지는 신흥 시장으로, 카르타고의 중요한 무역과 식민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북아프리카 등의 서부 지중해 세계는 물론 멀리 아프리카 내륙의 콩고까지 진출했다.
그러는 동안 카르타고에 경쟁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남부 마그나그라이키아의 그리스 식민시들은 유력한 경쟁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역의 경쟁자일 뿐 정치적 위협 요소는 되지 못했다. 게다가 로마의 반도 통일로 그들의 활동이 크게 약화된 것도 카르타고에는 적잖은 이득이었다.
서부 지중해에서 카르타고의 유일한 경쟁자는 아직 로마에 정복되지 않은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시들뿐이었다. 하지만 시칠리아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은 카르타고만이 아니었다. 지중해 진출을 시도하는 로마 역시 시칠리아를 손아귀에 넣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가 시칠리아라는 돌멩이를 걷어차면 돌멩이는 곧장 카르타고를 맞히게 된다. 어차피 맞붙어야 할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결에 불을 댕긴 것은 바로 그 돌멩이, 시칠리아였다.
인용
'역사&절기 > 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사, 3부 뿌리② -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영웅의 출현 (0) | 2022.01.04 |
---|---|
서양사, 3부 뿌리② -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예상 밖의 승리 (0) | 2022.01.04 |
서양사, 3부 뿌리②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귀족정+민주정+왕정 로마 공화정 (0) | 2022.01.02 |
서양사, 3부 뿌리②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고난 끝의 통일 (0) | 2022.01.02 |
서양사, 3부 뿌리②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평민들의 총파업 (0) | 2022.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