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나 욕심을 버리면서까지 예술에 빠져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게 궁금했는데 선생님은 “예술은 우리 삶에서 결핍된 부분을 채워준다.”라는 말로 그런 물음에 대답해주셨다.
결핍을 채워주는 예술의 가치
결핍, 그건 어느 순간이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 고개를 내밀려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내면 깊은 곳에 감춰져 있을 때는 모든 사람이 크게 문제될 것 없이 살지만, 조금이라도 머리를 내밀라치면 누구든 괴로워하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결핍은 박노해 시인이 말했듯 ‘건너뛴 삶’의 한 단면이어서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어느 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서서 성공한 자에겐 성공의 복수로, 패배한 자에겐 붉은 빛 회한을 남겨주는 것’일 수도 있고,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유아기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그런 결핍을 잘 해소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외치는 대목에선 전율이 일었다. 감동적인 음악을 들을 때 눈물이 나고, 광기어린 춤사위를 볼 때 온몸에 전기가 흐르며, 풍물의 격정적인 가락에 몸이 따라 반응하고 좋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 온몸에 감각이 곤두서서 밤새도록 그 흥분을 떨치지 못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예술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며 결핍을 치유하는데, 경계인이 된들 그게 얼마나 대수랴’라고 선생님은 말하고 있는 듯했다.
▲ 결핍을 채워주는 예술의 가치를 보여준 '수호의 하얀말'
예술이 지닌 가치를 보여준 명작, 『수호의 하얀말』
이 부분에서 선생님은 『수호의 하얀말』이라는 책을 극찬하셨다. 오스카 유우조라는 일본작가가 6~7년을 몽골에서 살며 이색적인 문화의 기운을 몸소 느꼈고 광활한 대지를 표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썼다고 한다. 한 편의 옛이야기를 쓰기 위해 6~7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가 정신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옛이야기는 몽골의 전통악기인 마두금馬頭琴(말 머리 모양의 악기)의 탄생 배경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하얀 말을 타고 몽골의 초원을 누빈다. 그때 관리가 말타기 대회를 열어 이긴 사람에겐 자신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특권을 준다고 하여 주인공은 대회에 참석한다. 하지만 일등을 했음에도 관리는 상을 주기보다 그 말을 빼앗았다. 그런데 말은 원래의 주인을 찾아 도망쳤고 관리와 그의 부하들은 그 말에게 엄청나게 활을 쏘아 맞춘다. 주인 앞에 도착한 말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만다. 그날 저녁 꿈에 말이 나타나 자신의 힘줄과 뼈로 악기를 만들어 달라고 말한다. 주인은 그 말대로 악기를 만들었고 그 악기를 연주할 때마다 자신과 초원을 누볐던 하얀 말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었고 그럴수록 악기 소리는 더욱 아름답게 울려서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고 한다.
말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악기, 거기엔 동물과 인간 사이의 감정의 교류가 스며있고 그 감정은 구슬픈 소리로 연주된다. 그걸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감동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인간의 결핍을 어떻게 메워주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옛이야기평론가다운 한 수 높은 전문가의 평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평론을 들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 조은숙 교수님과 함께 4명이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막국수와 메밀전병을 먹다.
강원도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은 자리였다.
넓이는 깊이를 포괄한다
저녁을 먹으며 나눈 대화의 핵심은 건호가 늘 고민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과연 음악가(뮤지션)가 되기 위해서는 음악이란 것에만 몰입하는 게 맞는지, 여러 다양한 경험을 한 후 음악을 공부하는 게 맞는지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선뜻 대답을 하시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거니 하는 정도의 대답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이력만 봐도 그 대답은 뻔했다.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건,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쓸 수 있는 해결방안이 많다는 이야기다. 모든 경험이 하나로 수렴될 때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갑작스런 상황에 내몰릴 때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내 길이 확실하다하여, 하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덧붙여 ‘문학-미술-음악’은 통한다는 얘길 해주셨다. 위에서 이야기 했다시피, 예술이란 장르로 묶어지는 문학-미술-음악은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임과 동시에, 결핍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음악을 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문학이나 미술을 함께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호에게 “꼭 피아노를 배우세요.”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세계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옛이야기
현대문학을 보다보면, 예술적인 의미에서 우리나라 작가 중에 카프카Franz Kafka(1883~1924)를 능가할만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셨다. 이청춘이 비견할만하지만 그 외엔 별 볼일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옛이야기를 이야기하면 완전히 양상이 달라진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는 짜임새도 짜임새지만 의미도 훨씬 깊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선 선생님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일례로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경우, 우리나라에선 어느 민담에서나 오누이가 함께 등장하는데 반해 일본에선 남자아이만 등장하며, 이야기 마지막에 누이가 밤이 무섭다며 자신이 해가 되겠다고 하자 오라비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바꿔준 것과 달리 다른 나라에선 ‘해=남자’라는 공식을 깬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민담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문학을 소개하려 할 때, 현대문학보다 옛이야기를 소개해주는 게 훨씬 자부심도 느껴지며 의미가 있다고 하신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3시간이 훌쩍 흐르고 말았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잠시,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처럼 격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대화를 계속 진행한다면, 2시간 정도 더 이야기가 진행될 거 같았다. 하지만 기차표를 이미 예매해뒀기에, 아쉽지만 이야기를 마쳐야 했다. 선생님과 함께 연구실을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서울에선 볼 수 없던 무수한 별들이 보였다.
▲ 김환희선생님의 싸인을 받다. 꼭 결제 받는 직장인의 모습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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