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이라는 신무기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치에 입당하던 1919년에 이탈리아에서도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지도자가 전 국민의 인기를 모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시스트당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였다. 사회주의 운동을 한 무솔리니는 파시즘(fascism)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면서 모든 이탈리아 국민의 결속을 주장했는데, 파시즘이란 ‘결속’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나왔으니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오늘날 파시즘의 원흉으로 꼽히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사회주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게다가 소련식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적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거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실상 사회주의의 이념과 원리는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파시즘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로 대척적이다(실제로 파시즘은 사회주의를 철저히 억압했고, 사회주의는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섰다)】.
무솔리니가 ‘뭉쳐야 한다’고 부르짖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마땅한 전리품을 얻지 못했다. 비록 양 다리를 걸치다가 뒤늦게 참전했고 전쟁에서도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그런 것뿐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불만이었다. 더구나 참전의 미끼였던 달마치야가 신생국 유고슬라비아에 넘어가자 국민들은 불만을 넘어 분통을 터뜨렸다. 약소국의 운명을 새삼 실감하게 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무솔리니의 ‘파쇼’는 가슴 깊이 파고드는 구호일 수밖에 없었다.
파시스트당이 인기를 얻을수록 국왕의 인기는 그에 반비례해 추락했다. 국민들은 국왕 에마누엘레 3세에게 당신이 그토록 참전을 주장했는데 대체 지금 얻은 게 무엇이냐고 따지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여 책임을 추궁한 것이다. 결국 1922년 에마누엘레는 무솔리니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제 이탈리아는 허수아비 왕을 제치고 무솔리니가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는 기묘한 왕국이 되었다.
‘결속’의 위력은 대단했다. 무엇이든 국민의 이름으로 집행하면 정당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 이외에 모든 정당을 법으로 금지했고, 대외적으로는 실추된 이탈리아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밀고 나갔다. 국가는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는 초법적인 기구였으며, 국가를 조종하는 주체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었다.
이 점에서는 독일도 결코 이탈리아에 못지않았다. 1933년 총리로 취임한 히틀러는 곧 의회를 해산하고 게슈타포라는 비밀경찰을 창설했으며, 나치만이 독일에서 유일한 정당이라고 선언하고 일당 독재체제를 갖추었다. 이듬해에 이름만 남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까지 겸하면서 공화국 체제를 폐지해버렸다. 서유럽의 공화주의 지식인들이 큰 기대를 걸었던 독일 역사상 가장 건강한 정권,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로써 10여 년 만에 깃발을 내렸다.
▲ 뭉치면 산다 지금은 파쇼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 들을 사람이 없겠지만, 1920년대의 파쇼는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말이었다. 파쇼는 원래 ‘뭉치자’는 뜻이니, 어려운 살림살이에 그 구호에 반대할 국민은 없었을 것이다. 사진은 1922년 로마로 들어오는 파시스트들이다(앞줄에 걷고 있는 사람들 중 한가운데 인물이 무솔리니다).
공화국이 사라졌으니 이제 독일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점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명쾌했다. 그는 독일을 ‘제3제국’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굳이 제국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문을 닫은 독일제국에 이어 두 번째일 텐데 왜 세 번째라고 했을까? 그는 역사적 근거를 들었다.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제국은 첫 번째가 아니다.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히틀러는 자신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적통을 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명칭은 총통이었지만 그는 황제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것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로마 황제를.
그래도 거기까지는 특별히 탓할 게 없고 굳이 미화하자면 독일식 민족주의의 발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히틀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광기로 나아갔다. 찬란한 역사를 가진 독일이 이 지경으로 몰락한 것을 설명하려면 뭔가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는 그것을 바로 유대인에게서 찾았다. 순수한 게르만족의 혈통이 유대인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으므로 유대인을 제거하면 독일의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터무니없는 논리였으나 독일 국민들의 상당수는 그의 광기에 동조했다【이렇게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은 대중적인 기반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은 흔히 말하는 독재와 다른 점이 있다. 독재는 국민의 지지 기반이 없어도 독재자가 군대 등을 이용해 유지하는 강압적 체제지만, 파시즘은 ‘파시즘화된’ 대다수 혹은 상당수의 국민들이 열렬히 지지하는 체제다. 이렇게 보면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파시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약간 모호해진다. 1972년 11월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서 93퍼센트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유신 체제는 파시즘이다. 그러나 계엄령을 내리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탄압한 가운데 국민투표가 강행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유신 체제는 독재다】. 대중 선동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적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두 나라는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늦은 19세기 후반에야 국가 통일과 국민국가를 이루었다. 물론 그보다 더 늦게 국민 국가를 형성한 나라들도 있다. 하지만 두 나라처럼 오랫동안 서양 역사의 주류였으면서도 통일과 국가 형성이 늦은 곳은 없었다(이탈리아와 독일의 국민들이 파시즘에 적극 동조한 것은 그런 역사적 두께에서 생겨난 국민적 기대감이 당시 두 나라가 처한 현실에 비해 훨씬 높았던 탓이다).
둘째, 그렇게 스타트가 늦은 탓에 두 나라는 다른 열강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뒤처졌다. 국내의 자본주의는 발전하는데 이를 소화할 해외 식민지가 부족한 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독일의 경우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부른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셋째, 시민사회의 전통이 없었다. 국가가 파시즘으로 치달으면 시민 사회가 제동을 거는 게 서유럽 국가들의 메커니즘이다. 시민혁명의 경험으로 시민사회의 전통이 형성되어 있던 영국과 프랑스라면 설사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다 하더라도 파시즘이 자리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후발 제국주의의 약점을 신속하게 극복하기 위해, 또 시민사회의 전통이 없다는 결함을 국가 체제의 힘으로 보완하기 위해 채택한 ‘신무기’라고 할 수 있다. 무기는 모름지기 실전에 투입해야 하는 법, 파시즘으로 무장한 두 나라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를 모색하던 전후 질서를 단순히 과도기‘로 만들어버리고 또 한 차례의 대형 국제전을 일으키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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