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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7부 열매② - 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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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불안의 과도기

 

 

평화의 모순

 

 

중세 이래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국제전에서도 늘 그랬듯이, 유럽 세계의 전쟁은 상대방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승부의 윤곽이 뚜렷해지면 전쟁을 끝맺고 타협과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로 조약을 맺어 새로운 질서를 수립했다. 그런 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패전국이라고 해서 나라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였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유럽 열강과 미국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를 탄생시킨다. 바로 국제연맹이다.

 

하지만 17세기 이래 세기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 국제전이 있었는데 왜 하필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런 기구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을까? 그 이유는 알기 쉽다.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세계 분할이 끝났기 때문이다. 유럽은 지구상의 모든 구석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속속들이 분할했다. 따라서 열강은 이제 더 이상의 분쟁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세 이후 처음에는 종교를 두고(30년 전쟁), 그다음에는 유럽의 영토를 두고(에스파냐-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나폴레옹 전쟁), 또 그다음에는 해외 식민지를 두고(1차 세계대전) 벌인 기나긴 월드 시리즈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분쟁이 아니라 조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게 국제연맹을 신설한 열강의 생각이었다중세 이래 유럽은 내내 분권화를 향한 역사를 전개해왔으므로 더더욱 그런 조정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국제연맹은 중세질서의 기반이었던 느슨한 통합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제국적 중앙집권 질서는 근대 유럽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최소한의 통합성은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국제연맹은 중세의 로마 교황과 같은 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아직 정답이 아니었고, 중세적 질서로 돌아가려면 또 한 차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 그 생각은 자가당착이요 자기 모순이다. 지배자의 눈으로 보면 세상만사가 아무 문제도 없다. 그냥 이렇게 살면 모두가 행복하리라고 막연하게 여긴다. “내 팔자에 무슨 난리야?”라는 말이 있지만, 정말 그렇다. 없는 놈의 팔자라면 차라리 난리라도 나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뒤집어질 테니까.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바로 그 없는 놈의 팔자를 계산에 넣지 않았다(아니면 알고도 모른 체 했거나). 내 집이 크면 남의 집이 작다.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던 시대, 세계의 상당 부분이 무주공산이던 옛날이라면 혹시 모를까, 이제 지구상 모든 구석이 알려졌으니 작은 집에 사는 없는 놈은 팔자를 고치려면 난리라도 피워야 했다.

 

특히 있는 놈이었다가 졸지에 없는 놈이 된 독일이 그런 처지였다. 191811월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독일에서는 공화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가 쫓겨났다. 독일 통일의 결실인 독일제국은 50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종말을 맞았다. 이듬해 1월 그 혁명을 주도한 바이마르에서는 독일연방 국민의회가 소집되었고, 다음 달에는 드디어 독일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다. 어찌 보면 1848년에 생겼어야 할 공화국이 무려 70년이나 지각한 셈이다(게다가 그때 공화국이 성립되었더라면 세계대전도 없었을 것이다).

 

 

극단적 좌파를 배제하고 온건 좌파의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새 공화국은 개혁 의지가 충만했다. 정부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했고, 노동자의 각종 권리를 보장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여 유럽의 국제사회 속에서 신생국 독일의 좌표를 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였다. 독일이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이었어도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갚지 못할 금액이었다.

 

공화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찍어해결하는 최악의 방법을 선택했다(그때까지 유럽 열강과 미국은 독일의 신생 공화국을 지원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경험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된다). 그에 따라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전쟁 전에 달러당 4.2마르크였던 환율은 배상금을 갚기 시작한 1922년 말에 무려 달러당 7000마르크로 올랐고, 그 이듬해에는 달러당 수조 마르크라는 믿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늪에 빠진 공화국을 건져준 것은 미국이었다. 통화개혁이라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처방으로 겨우겨우 버티던 독일에 미국은 절묘한 타개책을 제시했다. 미국이 차관으로 독일의 경제 복구를 도와주면 독일은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갚아나간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유럽 경제를 살려야 했고, 유럽 경제가 살려면 독일이 살아나야 했으니, 어느 누구도 불만을 품을 수 없는 방책이었다.

 

이리하여 가까스로 한숨 돌린 공화국은 다시 개혁의 고삐를 틀어쥐었는데, 문제는 또 있었다. 독일 국민들은 외국과 연이어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고 경제적으로 종속화되는 정부를 더 이상 신임하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정부의 성격이 중도좌파인 만큼 좌파와 우파의 반대가 극심했다. 바이마르 정부는 점차 국민들에게서, 또 정치 세력에게서 인기를 잃어갔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 복무한 경험으로 히틀러는 전후에도 계속 군대에 남아 있다가 1919년 독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독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으로 당명을 바꾸었는데, 이것을 줄인 말이 바로 나치 Nazi. 명칭에서 보듯이, 나치는 원래 사회주의 정당으로 출범했지만, 군 시절에도 히틀러의 주임무는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데 있었으니 그런 아이러니도 없다. 어쨌든 선동적인 연설로 순식간에 독일 국민들의 인기를 얻은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의 아픈 데를 찔렀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계속 호황을 유지했더라면 히틀러의 집권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29년 미국에서 터진 대공황의 물결이 유럽을 덮치면서 공화국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1932년 선거에서 나치는 독일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듬해 1월 히틀러는 드디어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다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독일은 독일식 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그것은 바로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파시즘의 조건 오늘날 서양 역사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히틀러라는 한 명의 광인이 일으킨 엄청난 불장난으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치 깃발이 집집마다 걸려 있는 이 사진에서 보듯이, 파시즘은 결코 몇몇 파시스트들이 선동해서 성립한 체제가 아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파시즘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엄연히 파시즘화된 대중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일국적으로 보면 파시즘 체제는 대단히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정치 실험이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평화의 모순

암흑의 목요일

파시즘이라는 신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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