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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중도와 뉴 웨이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중도와 뉴 웨이

건방진방랑자 2022. 3. 14.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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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뉴 웨이

 

 

중도란 무엇인가? 가운데 길인가? 가운데 길이란 무엇인가? 고통을 위한 고통은 결국 목샤(mokṣa, 解脫)라고 하는 자신의 출가의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어리석은 소치였다. 고행이 나를 벗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윤회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의 기쁨에 탐닉하여 욕망과 쾌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 것인가?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이를 가까이 해서는 아니 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이뇨? 하나는 모든 애욕에 탐착하는 것을 일삼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인 범부의 짓이다.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을 일삼아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니, 이것 또한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뛰어난 앎,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이 중도(中道, majjhima paṭipadā)라는 표현 때문에, 싯달타의 최초의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매우 일상적인 맥락에서 이해해버리기 쉽다. 소위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라 하는 것을 고도 아니고 낙도 아닌 그 가운데라는 식으로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중()이란 가운데(middle)가 아니다.

 

    X    

고통
 
가운데
 
쾌락
   

 

 

붓다 자신의 표현,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에서 우리는 이 버림이라는 사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버림은 곧 부정이다. ()이란 즉 고통과 쾌락이 완벽하게 부정되는 사태인 것이다. 즉 그것은 고통과 쾌락의 가운데 눈금이 아니라, 고통이나 쾌락으로는 도저히 도달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길인 것이다. ()이란 가운데가 아니요, 새로움이다. 붓다가 깨달은 중도란 미들 패쓰(Middle Path)가 아니요, 완벽하게 새로운 뉴 웨이(a completely New Way)인 것이다.

 

       
       
           

고통
   
쾌락
  aufheben  

 

 

그렇다면 이 고도 아니고 낙도 아닌 전혀 새로운 길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중도를 이해함에 있어 후기 논사들의 난해한 논리학을 연상할 수도 있다. 나가르쥬나(Nāgārjuna. 龍樹)중송(中頌, Madhyamaka-kārikā)의 난해한 부정의 논리를 따라 가느라고 낑낑댈 수도 있다.

 

 

 미르 뿌르 카스(Mirpur Khās), 파키스탄 신드지역(Sind Province, Pakistan)에서 발견되는 굽타시대(AD 4~6세기)의 불상,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듯한 인간적인 눈매가 이 지역 불상의 공통된 특징이다. 프린스 어브 웨일즈 박물관 소장(Prince of Wales Museum, Mumb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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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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