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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서설, 2. 신비주의와 고행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 서설, 2. 신비주의와 고행

건방진방랑자 2022. 3. 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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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여기에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죽음도 결국 우리 삶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영원히 우리 삶 속에 있다.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싯달타가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위하여 그는 몸부림쳤던 것이다.

 

이러한 몸부림 속에서 싯달타라는 한 인도청년이 깨달았던 것은 중도(madhyamá pratipad)였다. 안락의 방법으로도, 선정의 방법으로도, 고행의 방법으로도 접근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길! 그 길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싯달타가 고행의 극한에서 고행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속했던 거대한 문명의 체계에 대한 일대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도전이란,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어떠한 수행으로도, 일자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타자를 희생시키는 그러한 분열적ㆍ대립적 방법으로는 그가 소기했던 바 목샤(mokṣa, 解脫)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실존적 결단이요 포효였다. 그가 깨달았던 것은 어떠한 기존의 방법, 기존의 사유나 행위의 외재적 기준에 의한 완성으로는 살아있는 인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지금 완성코자 하는 것은 새로운 인간이요, 새로운 삶이다. 그는 지금 거룩한 사두(sadhu, 힌두교에서 말하는 성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새로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미스티시즘(mysticism), 모든 신비한 우주에의 통찰은 일자(the One)를 전제로 한다. 그 일자를 브라흐만이라 해도 좋고, 야훼라 해도 좋고, 알라라 해도 좋고, 아둠(Atum)이라 해도 좋고, 미트라(Mithra)라 해도 좋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ā)라 해도 좋고, 제우스라 해도 좋고, 그냥 하나님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이라 해도 좋고, 라오쯔(老子)가 말하는 따오()라 해도 좋다. 모든 미스티시즘의 본질은 이 일자와 인간의 만남(Encounter)의 관계의 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의 설정은 최소한 종교적 맥락에 있어서는, 반드시 바크티(bhakti)라는 심령적 실천의 분위기가 깔려있는 것이다. 바크티는 우리가 보통 ‘devotion’이라고 영역하기도 하고, ‘신애’(信愛)라고 한역하기도 하는데, 모든 종교는 사실 일자에 대한 사랑이나 헌신, 또는 믿음, 신앙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류의 종교의 형태는 이 바크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그 관계를 일자의 타자에로의 복종이나 복속의 일방적 관계로 설정하면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형태가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 바크티의 관계를 신과 인간, 이 양자가 서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설정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론(monotheism)의 범주를 뛰어넘는 갖가지 신비주의의 형태가 태어난다. 베다문학에서 잉태되어 우파니샤드의 철학으로 발전한 범아일여론(梵我一如論)도 유니크한 하나의 신비주의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소한 이러한 범아일여론은 싯달타라는 인도청년이 태어날 수 있는 문화적 기층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직접 간접으로 싯달타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1세기에 지어진 카쥬라호(Khajurāho)의 칸다리야 마하데바(Kandārya Mahādeva) 힌두사원의 전경. 이 사원은 1m가량의 조각품 872개로 휘덮여 있는데 에로티시즘의 역동적인 미투나상을 과시하고 있다. 아트만의 예찬은 나의 몸의 성적 에너지의 예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트만

 

 

아트만(ātman)이란 뭐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로 그냥 라는 말이다. 그것을 한역하여 ’()라고 했는데 범아일여론의 가 곧 이 아트만이다. 아트만은 본시 ’()을 의미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숨쉰다는 뜻이다. 그 숨, 그 기의 주체를 아리안계 고대인도인들은 아트만이라 불렀던 것이다.

 

지금 여러분들이 자신의 서재에 있을 법한 아무런 독한사전을 하나 펼쳐서 ‘atmen’이라는 동사를 찾아보면, ‘숨쉬다, 호흡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 독일어의 아트멘과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은 완전히 동근이다.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같은 계열의 단어이다. 히틀러가 자기네 게르만족만이 아리안의 적통을 이어받은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신념 아래, 무자비한 유대인의 학살극을 자행했는데, 그러한 터무니없는 선민의식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한 주장이 완벽하게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산스크리트어를 인도유러피안어군 속에 집어넣는 것도 산스크리트어가 많은 유럽언어의 모어적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독일철학자 헤겔이나 칸트같은 사람들의 사유나 싯달타의 사유 속에는 같은 혈통과 같은 언어의 흐름이 있을 수 있다는, 황당하게 들리지만 전혀 황당치 않은 이야기들을 평심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금부터 전개되는 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격리되어 발전된 듯이 보이는 인류의 고대문명들은 매우 격렬하게 교류된 하나의 문명이었다. 모든 문명은 오로지 교류로써만 생존한다. 사람도 매일매일 먹고(input) 싸지(output) 않으면 생존할 수 없듯이 문명도 매일매일 먹고 싸지 않으면 그냥 사멸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인도인들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정말 내가 있느냐? 상주(常住)ㆍ단일(單一)ㆍ주재(主宰)하는 불변의 자아가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자아가 있다면 그 자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칸트나 피히테, 헤겔의 철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질문들인 것이다. 베다의 사상가들이 이 우주의 외재적, 객관적, 궁극적 실재에 관심을 가졌다면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내재적 문제, 인간의 내면적 성찰, 즉 자아의 실상에 관하여 그 탐색의 방향을 전환하였던 것이다. 숨을 쉬고 있는 그 나가 과연 무엇인가? 깨어 있는 나가 진짜 나인가? 잠잘 때의 나가 진짜 나인가? 꿈꿀 때의 나가 진짜 나인가? 꿈도 안 꾸고 고요하게 숙면할 때의 나가 진짜 나인가?

 

우파니샤드(Upanisad)의 사상가들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상태에서의 모든 유한한 정신활동을 초월한 상태의 무분별한 희열, 일상체험이 아닌 요가와 같은 수행을 통하여 도달되는 신비적 엑스타시의 어떤 체험상태에서 아트만(ātman)의 궁극적 실상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인도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의 어지러운 거리 모습. 문명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브라흐만

 

 

브라흐만(Brahman)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현재 과학적 세계관에서 살고 있다. 신ㆍ불신을 막론하고, 즉 믿거나 말거나,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과학의 법칙 같은 것을 믿는다. 과학의 법칙이란 우주의 나타난 모습들의 배후에서 그것을 작동시키고 있는 어떤 규칙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들은 막연하지만 어떤 전체적 통일성 속에서 연관되어 작동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것을 믿는 동시에 우리는 예외 없이 과학이라는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 사람들도 이 우주가 우리의 감관(感官)에 나타난 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관에 나타난 현상(phenomena, appearance)의 배후에 어떤 궁극적 실재(ultimale reality)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궁극적 실재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통일적 힘(unifying Power)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적 사상가들에 의하여 새로운 맥락으로 발전했다. 즉 모든 찬송가나 기도, 주술이나 언어의 배경에는 그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이떤 신비적 힘(magical Power)이 있다. 고대인들은 이 힘을 그러한 우주의 통일적 원리로서의 궁극적 실재로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영어에 스펠’(spell)이란 말은 철자를 의미한다. 한 단어의 알파벳을 나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주술을 건다.’ ‘마력을 발휘한다는 뜻이 된다. 즉 제사장의 주술적 언어는 곧 우주의 신비로운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힘을 고대인도인들은 브라흐만(Brahman)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브라흐만의 주술적 힘을 구유(具有)한 제사장계급을 브라흐만계급이라 불렀고, 이들은 카스트의 최상층을 형성했다.

 

삼라만상이나 제신(諸神)들의 배후에 있는 이러한 근원적 실재나 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불러도 좋고, 브라흐만(Brahman)이라 불러도 좋고, ()라 불러도 좋다. 그것은 사실 언어적 표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우파니샤드(Upanisad)의 사상가들은 아트만(ātman)의 궁극적 실상 속에서 최종적으로 브라흐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게 되면 나라고 하는 피상적인 개별적 차별성이 사라지고 우주적인 브라흐만을 해후하게 되는 것이다.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이요,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다. 내가 곧 우주요, 우주가 곧 나다. 나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은 본시 하나였던 것이다.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곧 매크로 코스모스요, 매크로 코스모스가 곧 마이크로 코스모스였던 것이다. 타트 트밤 아씨(tad tvam asi), 네가 곧 그것이요, 아함 브라흐마 아스미(aham brahma asmi),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길희성, 인도철학사(서울 : 민음사, 1984), pp.37~8..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자들은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자기 자신 이외에 따로 두려워할 아무 대상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업(까르마)으로부터 자유로와지며 따라서 생전에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시바신에게 봉헌된 칸다리야 마하데바 사원의 중심부, 시카라(shikhara)의 장엄한 모습. 이 돌 무더기 중심부 핵심에 지성소가 자리잡고 있다. 지성소에 이르기까지 다섯단계의 구조가 있다.

1) 현관(ardha mandapa)

2) 소집회당(mandapa)

3) 대집회당(mahamandapa)

4) 전실(anterala)

5) 지성소(garbha griha)

하늘을 찌르는 이 돌 무더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남근형상이다. 시바가 살고 있는 카일라사 산의 모습이기도 하다.

 

 

합일과 피타고라스

 

 

우리는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위대한 철학이 이미 인도에 성숙되어 있었다면 도대체 싯달타라는 청년이 새롭게 얘기할 건덕지가 무엇이 있겠는가? 윤회와 해탈과 업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이미 완성되어 있지 아니 한가? 과연 싯달타가 말하는 중도란 무엇이며, 새로운 인간이란 무엇인가?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말을 잘 살펴보면, 여기에는 깊은 함정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브라흐만(Brahman)아트만(ātman)이 하나라는 이 명제 자체로도 기독교와 같이 신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복속이나 복종, 그리고 일방적인 관계로만 설정된 의미맥락에서는 매우 이단적일 뿐 아니라, 이미 충분히 서구의 유일신관과는 다른 동방적 신비주의의 원융(圓融)한 냄새를 풍긴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초기 기독교 정통파들의 주장대로 성자인 예수가 성부인 신과 한몸(homoousion tō Patri)이라고 한다면, 사실 모든 인간도 똑같이 신성을 구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에게 인성을 부여하는 한에 있어서, 그가 생멸의 대상인 한에 있어서, 그에게는 신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아리우스파들의 주장은 훨씬 더 명료하고 설득력이 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라는 인간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유니크한 절대성ㆍ불멸성ㆍ유일성ㆍ비창조성을 확보하기 위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3255월의 니케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Nicaea)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끝내 아리우스는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그를 저주한 콘스탄티누스대제-아타나시우스 계열의 삼위일체파들의 주장은 한없이 애매한 것이다. 예수라는 인간에게 완벽한 신성을 부여했다면, 범아일여론의 가능성을 모든 인간에게 부여했어야 하는 것이다삼위일체를 둘러싼 의논들은 매우 애매하다.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해설한 글로서 나는 암스트롱의 하기서를 들겠다. Karen Armstrong, “Trinity: The Christian God,” A History of God (New York : Ballantine Books, 1993), pp.107~131. 삼위일체 정통파들을 카파도시안즈(The Cappadocian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주장은 신은 하나의 본질(ousia)일 뿐인데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감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 본질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세 개의 표현태(hypostases)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성부, 성자, 성신이다. 성부, 성자, 성신 이 하나로써만은 항상 불완전한 파악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일체(一體)는 잠재태이며 삼위(三位)는 현실태인 것이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삼위일체설은 오히려 신을 인간화시키고 우상화시키는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철저히 피조물로서의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신일 수 없다. 로고스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신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그 무엇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으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신에 복종하였다. 그래서 신은 그에게 퀴리오스(kyrios, 주님)라는 신적인 타이틀을 주고 또 신적인 지위로 그를 승격시킨 것이다. 예수의 신성은 예수의 본질이 아니라 후천적인 보상이며 선물이다.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우리 인간은 인간예수를 본받을 수 있기에 우리도 신격화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에게는 예수의 인성에 관한 철저한 인본주의와 인간의 신격화에 대한 낙관주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를 철저하게 신성적 존재로 보고 그 인간적 모습은 구속자로서의 현현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예수가 인성의 허약함에 복속된다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분리시키면 다신론의 위험성이 개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범아일여론을 자세히 뜯어보면, ()과 아(), 그리고 일여(一如)라는 말 자체가 모두 심각한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범아일여의 도식 속에는 어디까지나 범과 아가 독립적인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범과 아가 하나라는 얘기는 매우 신비스럽게 들리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이기 전에 그 둘이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끼리 당신과 나는 하나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결국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감언이설의 내면에는 당신과 나의 실체적 분열이 심각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라는 말, ‘일여라는 말, 보다 정확하게는 합일이라는 말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신비주의는 우주의 통일성ㆍ제일성ㆍ합법성의 원리로서 일자(一者, the One)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신비주의자들은 이 일자와 교섭이 되는 루트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러한 루트를 통해서 궁극에는 그 일자와 하나가 되는, 즉 합일이 되는 경지를 추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그레코로망의 전통의 배면에도 깊게 깔려있는 흐름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c. 580~c. 500 BC)는 그러한 합일의 열쇠를 수학이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자라기보다는 어떤 모종의 신비주의적 종단의 교주였으며, 그 자신 일차적으로 철저한 신비주의자였다. 수학의 특징은 경험적 사태에 의존하지 않고, 보리수 밑에서 사색하는 싯달타처럼, 인간의 사유의 능력만으로 어떤 우주의 신비를 풀어나가는 그러한 의식과정을 전개시킨다는 것이다. 골방에 쑤셔 박혀 복잡한 방정식을 푸느라고 골몰하고 있는 수학자야말로, 우주의 일자와 합일이 되기 위해서 산 속의 토굴 속에서 사색에 몰두하고 있는 신비주의자와 본질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다. 수학의 특징은 연역적 사유의 관계양상, 우리가 토톨로지(tautology)라 부르는 등식의 관계를 끊임없이 변주시켜 나가면서 최후의 어느 일순간에 그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는 데 있다. 즉 수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돈오의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수학은 인간의 영혼에게 돈오의 취하는 기쁨’(the intoxicating delight of sudden understanding)을 제공하는 것이다. 수학의 이론, 우리가 소위 테오리아’(theoria)라고 부르는 이론은 과학의 이론이기 전에 일차적으로 엑스타시적인 계시’(ecstatic revelation)였다. 최소한 피타고라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계시야말로 수학이 그에게 주는 의미였다수학을 돈오와 연결시켜 설명한 것은 이미 수학자이며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버트란드 럿셀경이 그 유명한 서양철학사속에서 한 말이다.

For Pythagoras, the ‘passionate sympathetic contemplation’ was intellectual, and issued in mathematical knowledge. In this way, through Pythagoreanism, ‘theory’ gradually acquired its modern meaning; but for all who were inspired by Pythagoras it retained an element of ecstatic revelation. To those who have reluctantly learnt a little mathematics in school this may seem strange; but to those who have experienced the intoxicating delight of sudden understanding that mathematics gives, from time to time, to those who love it, the Pythagorian view will seem completely natural even if untrue.

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New York : A Touchstone Book, 1972), p.33..

 

 

 피타고라스 모습이 새겨진 5세기초 주화

 

 

신비주의적 합일

 

 

최근, 프린스턴 수학자 죤 내쉬(John Nash)의 생애를 다룬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라는 영화가 말해주듯이, 수학적 환각과 노벨상의 차이는 백지장 한 장의 차이와도 같을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적법적 후계자이다. 플라톤 자신이 여기저기서 파르메니데스나 피타고라스에게 진 빚을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고백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희랍인들의 우주론적 구상을 추상적 사유의 길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말하는 추상적 사유(abstract thought)는 외부의 사실에 관계없이 작동하는 마음의 원리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감관적 세계를 무시하고 사유적 세계만을 리얼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 철학의 측면이 피타고라스의 수학에 의하여 더욱 체계화되었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가시계(可視界)와 가사계(可思界)를 완전히 대립적인 구도 속에서 파악하는 이원론의 전형일 뿐 아니라, 그 배후에는, ‘동굴의 비유가 말하는 바와 같이, 영혼의 해방주의라는 매우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게 깔려있다. 뿐만 아니라 초기기독교의 원형이라 말할 수 있는 영지주의(Gnosticism)도 인간을 영지(Gnosis)의 소유자로서 파악한다. 그리고 이 영지야말로 피타고라스의 수학처럼 우주의 모든 신비를 푸는 열쇠가 된다. 이 영지주의적 세계관의 배면에는 인간과 세계의 분열이 있고, 또 세계와 신의 분열이 있다. 신은 절대적 존재이며 빛(Light)이며 생명(Life)이며 영혼(Spirit)이며 로고스(Logos) 즉 말씀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 세계와 대적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신은 이 세계에 대하여 초월자이며, 이 세계의 창조주가 아니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하위개념의 데미어지(Demiurge)로서 따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적 세계관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초월적인 신의 다른 이름이 인간이다. 인간만이 순수한 신성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신의 세계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영지는 다름 아닌 신에 대한 앎’(Knowledge of God)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을 중개하기 위하여 이 세계로 파견된 구세주의 도움을 받아 인간에 내재해 있는 그 앎에 대하여 각성을 하게 되고 다시 신과 융합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의 갖가지 형태들은 내가 말하는 파미르고원의 서남쪽, 그러니까 인도문명으로부터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희랍 등의 제문명의 기저를 형성하는 것이며, 모든 원초적 샤마니즘적 사유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주의적 합일은 모든 바크티 신앙의 형태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성스러운 사원에 왜 음탕한 미투나(Mithuna)상을 조각해 넣었을까?

여러 설이 있다.

1) 남성의 성적 에너지의 상징인 시바와 여성의 성적 에너지의 상징인 샤크티(Shakti)의 결합을 통해 해탈을 추구한 힌두밀교의 영향

2) 브라흐만(Brahman) 청년들을 성적으로 교육시키는 교본

3) 음탕한 우신(雨神) 인드라를 즐겁게 해주어 벼락을 예방

4) 단순한 신들의 유희

5) 신들을 위한 인간들의 유희

6) 도덕관념에 쩔지 않는 당시 생활상의 적나라한 표현

7) 불교와 대항키 위하여 신도를 끄는 선전효과

8) 출가자들의 대리만족

가장 중요한 것은 인도인들은 성을 통하여 합일을 추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쾌락의 극한상태에서 금욕의 정적을 유지하는 아이러니가 이 신상들의 모습 속에 서려 있다.

 

 

고행의 단념과 안아트만

 

 

그런데 내가 여기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든 미스티시즘의 갖가지 형태들이 표방하는 합일’(合一)이라는 말의 무의미성, 신화성, 기만성에 관한 싯달타의 통찰이다. 도대체 합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흔히 도를 통했다 하는 사람들이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비경 속에 주ㆍ객이 통합되는 합일의 경지를 체득했다고 지껄이는 얘기들을 수없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합일이라는 말처럼 기만적인 말도 없다.

 

나는 우주와 합일되었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거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주적 인간으로서, 신적 인간으로서, 전지전능한 인간으로서 경배해야할 것인가? 나는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 나는 신과 합일이 되었다. 그래 정말 합일이 되었냐? 그래 우주와 합일이 되고 신과 합일이 되어보니 어떻더냐? 그것은 정말 말뿐인, 레토릭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같은 인간도 수염이나 기르고 거룩하게 옷입고 앉아서 우주와 합일이 된 거룩한 경지를 획득했다고 체하기만 하면 그런 사기에 깜빡 죽을 사람들을 수일 내 수천수만 명을 모으기도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인간의 허약이란 바로 그러한 도사나 야바위꾼, 아트만(ātman)브라흐만(Brahman)이 합일되었다고 외쳐대는 인간들의 존재를 항시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합일이라는 말의 함정에서 헤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신비주의의 함정이다. 우리는 신의 멧신저라고 야바위치는 목사에게 사기를 당해서는 아니 되지만, 도통했다고 토굴 속에 앉아있는 스님에게 사기를 당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붓다, 바로 그 존재로부터 사기를 당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불행한 일은 불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로 우리 자신이 붓다를 사기꾼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어느 새인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홀로 도통한 사기꾼으로 변모되어 가고만 있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말,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이러한 일체감의 확신의 표현의 언사에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분열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합일이라는 말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일자(一者)가 나의 존재로부터 타자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신의 분열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과 신의 분열이 전제되어 있는 한, 그 사이에는 영원히 바크티라는 신앙이 개재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은 항상 비굴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니이체나 20세기의 래디칼한 진보신학자들처럼 신을 죽여야 할까? 과연 신은 살해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미 이천오륙백년 전에 인도의 청년 싯달타가 던졌던 질문들이다. 과연 신을 죽일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우리의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신을 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결코 이런 방식으로는 살해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의 살해를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니이체처럼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스러지고 말 뿐이다.

 

여기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계속하면 할수록 무의미해지는 이유는 바로 일자(一者)를 타자화시켰다는 최초의 함정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의 문제를 나 밖에 있는 어떤 존재의 양상으로 생각했다는 바로 그 존재의 분열에 모든 문제의 원천(Ursprung)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의 존재 밖에 있는 신을 죽이려 한다면 또 다시 나의 존재의 분열은 점점 심화되어갈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하여 중도의 자각을 얻는 순간, 싯달타는 외쳤을 것이다. 그 해결의 유일한 길은 바로 신을 생각하는 나, 아트만(ātman)을 본질적으로 해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상주ㆍ불변ㆍ단일의 동일자가 아트만으로서 나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 그 자체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즉 아트만의 살해가 아닌, 아트만의 무화(無化)인 것이다. 이 아트만의 무화의 방향을 싯달타는 안아트만(anatman), 무아’(無我)라 불렀다. 이 싯달타의 무아의 각성이야말로 인류정신사에 시작도 끝도 없는 최대의 혁명이며, 최고의 비상이며, 모든 종교의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중도의 자각을 얻고 나서 싯달타는 고행을 단념하였다. 그의 몸은 허약하고 쇠약하고 지칠대로 지쳐빠졌다. 그때 시타림에서 6년 간 고락을 같이 했던 카운디냐(憍陳如, Ājñāta Kauṇḍinya) 등 다섯 명의 친구들憍陳如 등 다섯 명의 친구들이란 싯달타의 아버지 淨飯王이 파송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다섯 명의 정확한 이름은 알 길이 없다. 中本起經에는 拘憐(카운디냐=憍陳如), 頞陛(알폐), 拔提(발데), 十力迦葉, 摩南拘利로 되어있다. 아함에 나타나므로 그 전승이 상당히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전기작가들에 의한 양식적 구성일 것이다. 마하박가에도 다섯 비구라는 표현으로만 등장한다. 이 다섯 비구는 후일 싯달타가 성도한 후에 초전법륜을 득한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고행의 방법을 통하여 같이 해탈을 득하고야 말리라 했던 사나이의 맹약이 깨져버리는 배신감, 그들은 싯달타의 중도(中道)의 깨달음을 고행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허약한 인간의 도중하차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 다섯 명의 친구들은 고행을 중단하고 원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구걸에 나서는 싯달타를 매우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힌두전통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인 카시(Kāshī), 그 빛의 성지(City of Light)인 바라나시(Vārānasī)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바라나시(Varanasi)는 간지스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바라나강(the Varanā River)과 아시강(the Asi River), 두 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옛 이름은 카시(Kāshī)이다. 바나라스(Banaras), 베나레스(Benares)라고도 불린다. 카시는 간지스강 유역에 정착한 북인도의 아리안종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카시는 코살라국(the Kosala kingdom)에 편입되었다가 결국 마가다국(the Magadha Empire)으로 복속되었다. 카시의 산스크리트어원(kāsh)에 빛난다(to shine)는 뜻이 있어 보통 빛의 도시’(City of Light)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시바(Shiva)신의 광채가 여기서 빛난다는 뜻이다. 인도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이며 강가(Ganga)의 여신이 사가라(Raja Sagara)6만 명의 죽은 아들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하강했다는 전설에 따라, 인도인들은 여기 간지스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서 죽고 가트(Ghat, 강둑)에서 화장되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죽기 위한 최상의 장소인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고대도시들이 그 실상인즉슨 근대적 삶으로 다 전환되었지만 카시만은 옛 모습 옛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 역사보다 더 오래된 도시’(Benares is older than history.)라 한 재미있는 표현 그대로 태고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하바드대학의 인도학교수 에크의 하기서는 바라나시 도시의 모든 것에 관한 훌륭한 보고서이다. Diana L. Eck, Banaras, city of light, New Delhi : Penguin, 1983.. 그때 싯달타가 느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섯명의 친구들이 싯달타를 떠나 도착한 카시의 수행지, 나물 캐는 소녀가 그 곳 스투파에서 쑥을 캐고 있었다. 사진을 찍자 나에게 ‘텐 루피’를 달라고 손을 벌렸다.

 

싯달타의 고독

 

 

그것은 고독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한 평범한 사나이의 서글픈 고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러한 고독이 아니었다. 자신의 중도의 깨달음의 계기가 도저히 그 친구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는 소외된 느낌이 그 고독감의 출발이었겠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모든 고()로부터의 해탈이 궁극적으로 타인과 더불어 이루어질 수 없는 나 홀로만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던져주는 황량한 고존(孤存)의 고독이었던 것이다.

 

후대의 전기작가들은 이 대목에서 다섯 친구들이 싯달타를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몄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싯달타 자신이 중도의 깨달음을 득한 후에 주체적으로 그들을 멀리 했을 것이다. 최소한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 싯달타의 고행(苦行)은 고행(孤行)으로 바뀌어야만 했던 필연성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매우 신화적인 기술이지만 싯달타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서 사방을 두루 살피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한 이야기가 여기저기 기록되고 있다이 이야기는 이미 불교의 근본경전이라 할 수 있는 修行本起經에 다 오고 있으므로(아함과 동시대의 고본으로 추정됨) 매우 초기의 설화양식으로 이겨진다[夫人攀樹枝, 便從古脇生墮地, 行七步, 擧手而言: “天上天下, 唯其爲尊. 三界皆苦, 吾當安之.” 修行本起經, 大正3-463.. 얼핏 듣기에 매우 조잡하고, 저 혼자 잘났다고 까부는 어린아이의 망언처럼 들릴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에도 매우 어긋나는 발언이지만, 이것은 후에 이루어지는 성도, 다시 말해서 독존의 독각(獨覺)과 관련하여 지어진 설화일 것이다. 그것은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독한 실존에 대한 자만과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제 싯달타는 홀로 갈 수밖에 없다. 저 니련선하를 건너 보이는 시커먼 시타림에서 저 광채서린 보드가야의 핍팔라나무(畢波羅樹, Pipphala-druma: 畢鉢羅樹, 畢撥樹라고도 쓴다)까지의 싯달타의 고행(孤行)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문제가 나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독한 존재의 내부에 있을 뿐이라는 문제의식의 일대전환, 목샤(mokṣa, 解脫)의 이상, 고해를 벗어던진 자유와 안락의 열반이 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나 실존의 일심(一心)상에서 얻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바로 중도요, 이 깨달음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뉴우 웨이(New Way)였다.

 

 

 

 

고행 단념한 뒤 싯달타의 행동

 

 

고행을 중단하고 그는 우선 체력을 회복하기로 결심하였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물을 좀 마시고 잠을 청하였다. 깊은 잠을 좀 자고 나니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약간의 힘이 생겼다. 그래서 싯달타는 생각하였다.

나의 육신은 너무도 피폐해 있다. 이 육신으로는 도저히 도를 성취할 수 없다. 비록 신통력으로 몸을 회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일체 중생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니 부처가 도를 구하는 법이 아니다. 이제 나는 육신의 힘을 얻기에 좋은 음식을 받아 체력을 회복하여 다시 무상의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리라!’

 

이때 허공의 제신들이 싯달타가 마음 속으로 이와 같이 작정한 것을 알고 그에게 속삭였다.

존자이시여! 굳이 음식을 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신통력으로 당신의 모공을 통하여 자미를 주입시켜 기력을 본래와 같이 회복시켜 음식을 드신 것과 다름없이 하겠습니다.”

 

그러자 싯달타는 이를 거절하여 말하였다.

나는 이미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오래되었소. 내 이 파리한 몸으로써 도를 얻는다면, 저 외도의 사람들은 나의 굶주림의 고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원인이라고 말할 것이요. 이것이야말로 모든 중생을 기만하는 일이요. 나는 반드시 세간의 음식을 받아 먹은 후에야 도를 이룰 것이요.”

 

40일간 광야에서 시험받던 예수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탄의 유혹이 들려왔다.

그대, 왜 저 돌맹이들을 떡덩이로 만들지 아니 하는가?” 4:3, 4:3,

 

반드시 세간의 음식을 받아먹은 후에야 도를 이루겠다는 이 싯달타의 확언이야말로 바로 중도의 실천이요, 고독의 첫걸음이다. 고독한 인간들, 홀로 선 인간들이 다 평범하게 하는 짓을 하면서 그 가운데서 도를 이루겠다는 싯달타의 결의는 매우 새로운 길이다.

 

싯달타는 또 생각하였다.

‘6년의 고행 끝에 옷이 모두 해져서 벌거숭이와 같구나, 이제 저 시체를 쌌던 분소의(糞掃衣)라도 갖추어 입으리라!’

 

싯달타는 시타림 속에 누더기 천이 딩굴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니련선하의 하반으로 내려가서 빨고자 하였다. 이때 제석천(帝釋天)이 다가와 싯달타에게 속삭였다.

존자여, 제가 그대를 위하여 이 헌 옷을 빨겠사오니 원컨대 허락하소서.”

 

싯달타는 거절하였다.

모든 사문들은 남을 시켜서 옷을 빨지 않소. 누더기를 스스로 빠는 것이 우리 출가자들의 법이요.”

 

분소의를 빨아 나뭇가지에 널은 싯달타는 나이란쟈나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싯달타는 목욕하기를 마쳤으나 몸이 워낙 쇠약한지라 물결에 밀려 혼자서는 도저히 강기슭으로 올라 올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을 경()들은 마왕 파순이 강기슭을 갑자기 고준(高峻)한 절벽으로 변모시켰다고 신화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때 그 강변에 있던 아사나(阿斯那) 나무의 신이 나뭇가지 하나를 휘어 낮게 드리우자 싯달타는 그것을 잡고 가까스로 언덕으로 올라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분소의를 걸쳤다[浣衣已訖, 入池澡浴. 時魔波王波旬變其池岸極令高峻. 池邊有樹名阿斯那. 是時樹神按樹令低. 菩薩攀枝得上池[]. 於彼樹下自納故衣]方廣大莊嚴經卷第七, 往尼連河品第十八, 大正3-583..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서린다. 극심한 고행 끝에 고행을 단념한 싯달타, 사랑하던 친구들과 이별하고, 보통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동냥해먹으리라 결심하고, 길거리에 버려진 누더기 천을 주워 안간힘을 써서 그것을 홀로 빨고, 강물에 몸을 담가 6년간 누적된 때를 씻었으나, 몸이 휘엉청 가눌 수 없어 강기슭에 올라 올 수조차 없는 싯달타, 그 얼마나 고독한 한 인간의 모습인가? 나무신조차 그를 가엾게 여겨 나뭇가지 하나를 휘어 낮게 드리웠다고 신화적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것은 나뭇가지 하나를 휘어잡을 수 없는 한 인간의 기력없는 극단적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인도인의 옷은 기다란 천이다. 그것을 휘감아 입는 것이다. 빨래한 후에는 강둑에 기다랗게 널어서 말린다. 싯달타도 이렇게 분소의를 빨아 입었을 것이다.

 

 

싯달타와 수자타

 

 

이때, 허기의 극도에 달한 고독한 싯달타에게 우루벨라(Uruvelā, 優留毘羅)‘Uruvila-grama’로 불리기도 하고, ‘優婁頻螺로 한역되기도 한다. 다양한 표기법이 있다마을로부터의 한 아리따운 처녀가 등장한다. 그 처녀가 우연히 강가나 강 주변의 수풀로 오게 되었는지, 싯달타가 우루벨라마을로 들어가 공양을 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부분의 기술도 경에 따라 복잡다단한 전승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녀의 이름은 불교도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수자타(Sujata, 須闍多)! 싯달타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의 대각을 이룰 수 있는 최초의 에너지를 제공한 유미(乳糜, madhupayasa) 죽을 공양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던 여인이었다. 전승에 따라서는 그 최초의 공양자는 수자타가 아닌 그냥 두 여인으로 기술이 되기도 하고, 난다와 난다발라(Nanda & Nandabalā), 혹은 난다와 우빠난다(Nanda & Upananda)라는 두 자매로 기술이 되기도 한다. 이 두 자매는 소치는 소녀[牧牛女]들로 전하여지고 있다이 유미공양(乳糜供養)의 수자타설화는 비아리안계통, 그러니까 아리안계의 사람들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이전의 토착적 문화와 관련있다는 미야사카 유우쇼오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나가(Nāga) 신앙의 한 양식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宮坂有勝, 佛敎起源(東京 : 山喜房佛書林, 1987), p.352. ‘須闍多라는 한자음역이름은 佛本行集經에 보이는데 그것을 의역하여 善生,’ ‘善生女라 했다. 方廣大莊嚴經에는 善生,’ ‘善生女라고만 나오고 음역은 나오지 않는다. 산스크리트어로 ‘su’는 형용사로 쓰일 때는 ,’ ‘좋은의 뜻이고 부사로 쓰일 때는 지극히,’ ‘극도로의 뜻이다. ‘jata’는 태어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Sujata’잘 태어났다’[善生]는 뜻이다. 태생의 환경이나 시기나 운수가 모두 좋다는 넓은 뜻이겠지만 우리말로 잘 생겼다’[善生]는 의미도 포함할 것이다. 佛本行集經에는 彼女端正, 可喜無雙.’이라 하여 그 외모의 아리따움이 강조되고 있다. 경전에는 모두 이 여인에게 전날 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위인이 나타나리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이러한 신화적 기술방식은 그 우연한 해후장면의 감동을 경감시킬 뿐이다. 佛本行集經에는 둘이서 만나는 첫 장면이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싯달타가 먼저 도공의 집으로 들어가 깨진 항아리 조각 하나를 구걸한다. 그리고 그 항아리 조각을 들고 우루벨라 마을 집들을 차례로 걸식해간다. 드디어 우루벨라 마을의 촌장집으로 걸식하러 들어서게 된다. 그 때였다. 그 촌장집의 용모단정한 딸인 수자타가 싯달타가 묵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 그 처녀의 양 젖가슴에는 뿌연 젖이 스스로 철철 넘쳐흘렀다 운운[善生見已, 從其二乳, 自然汁出].

 

싯달타와 수자타의 해후를 둘러싼 이야기는, 오뒷세우스에서 호머가 그리고 있는, 오딧세우스와 스케리아의 왕 아루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Nausikaa, Ναυσικάα)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설화와 지극히 유사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는 이러한 신화에서 힌트를 얻어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라는 걸작 만화영화를 만들었다.)

 

싯달타는 수자타에게서 귀한 유미죽 한 그릇을 얻어, 우루벨라 마을을 나와 다시 나이란쟈나강변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수염깎고 머리깎고 목욕재계하고 용왕의 왕비[河中龍妃]가 마련한 깨끗한 자리에 앉아, 그 유미죽을 들고 순식간에 32상을 회복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 32상이란 매우 신화적인 싯달타의 용모에 관한 양식적 표현인데, 결국 32상을 회복하였다 하는 것은 그가 건강한 원래 자기 모습을 회복하였다는 뜻이다. 시타림에서 6년 간의 고행 끝에 수척해진 몸이 유미죽 한 그릇에 32상으로 회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생각키에 싯달타는 우루벨라촌에 들어가 그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자의 집에서 몇 달을 기거하면서 죽과 밥의 공양을 얻어, 완벽한 자기 몸 컨디션을 회복한 연후에, 지극한 정상인으로서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을 수 있는 사색의 자리를 마련하러 떠났을 것이다.

 

그는 우선 우루벨라 마을을 떠나 자신의 고행의 장소였던 시타림으로 갔다. 시타림을 굽어보고 있는 매우 각박한 석산이 하나 있다. 싯달타는 그 각박한 석산으로 올라갔다. 그가 정각을 얻기 전에 올랐던 산이라 하여 우리는 그 산을 전정각산(前正覺山, Prag Bodhigiri)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싯달타가 그 산의 정상에 올라서자, 온 산이 진동하면서 난리를 쳤다. 싯달타가 여태까지 닦아 온 공덕의 무게에 짓눌린 산신(山神)들이 쇼크를 먹고 날뛰었던 것이다. 산신들은 싯달타에게 저기 저 강 건너 평온한 땅, 핍팔라나무가 서있는 자리를 권고하게 된다. 한마디로 전정각산은 싯달타의 성도의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싯달타는 풍수지리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명당이란 곧 자기 몸의 기와 산세의 기가 화합되는 곳이다. 싯달타는 전정각산 산정에서 그 불화의 기를 감지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곳을 가보면 전정각산은 역시 고행의 장소는 될지언정, 중도의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심히 각박한 석산이다. 그러나 이 산의 동굴에서 살던 한 용(Nāga)은 자신의 동굴 안에서 싯달타가 성도하기를 원했고 그가 떠나기로 한 결단을 매우 아쉬워했다. 그래서 싯달타는 그 굴속에 들어가 자기 그림자만을 남겨놓고 떠났다. 지금도 그 굴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그 굴을 유영굴(留影窟)이라 부른다. 지금은 티벹사원이 그 옆에 자리잡고 있다.

 

 

 안개 속의 낙타 봉우리가 전정각산이다. 유영굴이 있는 봉우리에서 촬영

 

 

 유영굴 내부, 유영굴 이야기는 우리나라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도 재미있게 기술되어 있다. 일연스님의 세심한 마음과 국제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인도신화와 단군신화

 

 

이윽고 싯달타는 핍팔라나무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때 싯달타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과거의 보살들은 어떤 자리에 어떻게 앉아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하였을꼬?

 

이때 우연찮게 옆에서 어느 아동이 싯달타의 우편에서 풀을 베고 있었다. 신화적 기술에 의하면 이 아동은 바로 석제환인(釋帝桓因)이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석제환인의 원어는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Ṡakra-devānāṃ Indra, 釋迦提婆因陀羅)인데, 이때 샤크라()釋迦羅라고도 음사하는데 위용이 있다.’ ‘힘이 있다.’ ‘강하다는 뜻으로 신에 대한 존칭의 접두어로 쓰이고 있다. 여기 뎨환’(帝桓)‘deva’에서 온 것으로 하늘을 말하는 것이요. 신을 말하는 것이다. ()은 인드라(Indra, 因陀羅)의 약어이다. 인드라는 불교이전부터 인도의 베다문학에서 천둥과 폭풍의 신(God of thunderbolt and storm)으로 여겨져 왔으며 오른손에는 항상 금강저(Vajra)를 들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인도신화에서는 바루나(Varuna)신과 항상 라이벌관계에 있는데, 아마도 인드라는 브라흐만(Brahman) 계급을 대변하고 바루나는 크샤트리아계급을 대변하는 듯이 보인다. 후대 불교신화 속에서는 인드라는 불법의 수호신으로서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주신인 제석천(帝釋天)으로 변모한다.

 

내가 여기서 이러한 해설을 좀 장황하게 말하고 있는 뜻은, 바로 우리나라 단군신화에서 웅녀와 결혼한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桓雄)의 아버지가 환인(桓因)이라는 사실을 좀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스님 일연 자신이 환인을 말하면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고 주석을 달아놓고 있는데, 바로 환인의 환은 데바를 말한 것이요, 인은 인드라를 말한 것임이 확연해진다.

 

() deva 하늘에서 온 신
() indra 천둥ㆍ푹풍의 신

 

 

이 환인이 저 하늘 꼭대기에서 삼위태백(三危太伯)을 굽어보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펴라 하고 그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신단수(神壇樹) 밑으로 내려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가 거느리고 내려온 신하들이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였으니 이 모두 인도신화에서 인드라가 폭풍과 천둥의 신이라 했던 그 성격규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다문학에서 인드라는 브리뜨라(Vritra)라는 신과 항상 대결하는데 바로 브리뜨라는 가뭄의 신이다. 가뭄으로부터 인간세를 보호하는 인드라의 신성(神性)이야말로 조선의 땅에 풍요로운 신시를 펼칠 수 있게 하는 신으로서 적격이었던 것이다. 환웅이라는 이름은 환인에서 아들이라는 뜻으로 인을 웅으로 변조시켜 탄생된 것이다. 알고 보면 이 모든 신화들이 이렇게 교류된 것이고, 비록 그것이 표현상의 가차(假借)일 수는 있으나, 너무 신화를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모두 문명의 본질에 어긋나는 짓이다. 인드라 제석신앙은 일연이 살았던 불교국가, 고려조에 매우 성행했던 종교적 프랙티스(Practice)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 그 유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있는 인드라의 모습. 번개로 위용을 과시하는 희랍신화의 제우스와 상통한다. 우리 단군신화의 조형, 상서로운 동물을 타고 있다. 이 동물이 우리 신화에서는 곰이 되었을 것이다.

 

 

길상과의 대화

 

 

자아! 이제 싯달타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른편에서 풀을 베고 있던 아동은 싯달타에게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서있었다. 그가 들고 있었던 풀은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초록색에, 공작새의 꼬리와도 같이 부드럽고 연하여 그 사랑스럽기가 마치 카칠린다까(迦尸迦衣)새의 깃털로 만든 아름다운 비단결과도 같았다. 그 풍겨 나오는 그윽한 향기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감돌면서 자오록하였다. 그 미묘한 풀을 들고 있는 아동에게 싯달타는 다가갔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뇨?”

 

저의 이름은 길상(吉祥)이외다.”

 

그것 참 신묘롭구나! 나 자신 길상함을 얻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그 길상함을 여기 그대로부터 얻는 것 같구나, 이름이 길상인 그대가 내 앞에 섰으니 이제 나는 틀림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ā samyak-saṃbodhi)를 증득하리로다.”

 

그때 이 길상이 무어라 말하는데 천상에서 들려오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맑고 깨끗한 칼라빙카(迦陵頻伽) 새소리와도 같았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그대여! 나에게 그 청정한 풀을 줄 수 있느뇨?”

 

이렇게 해서 싯달타는 길상에게서 얻은 풀로 자리를 엮은 후, 나무줄기를 등에 대고 동쪽을 향해 앉았다. 그리고 백 개의 벼락이 한꺼번에 떨어져도 부스러지거나 움찔하지도 않을 자세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싯달타는 포효한다方廣大莊嚴經卷第八, 詣菩提場品第十九, 大正3-588..

 

我今若不證 無上大菩提 내 지금으로부터 이 자리에서 무상의 큰 지혜를 얻지 않으면
寧可碎是身 終不起此座 이 몸이 다 마르고 부서지더라도 결단코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

 

 

 

 

 보드가야의 금강보좌. 이것이 핍팔라나무 측 보리수이다. 싯달타는 바로 이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인용

목차

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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