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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고행과 해탈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고행과 해탈

건방진방랑자 2022. 3. 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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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과 해탈

 

 

신체적 고행이란 반드시 위대한 수행승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성철스님과 같은 위대한 수행자보다도 더 치열한 용맹정진 속에 신체적 고행을 감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해 태능선수촌에서 신체적 극기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청년들, 세계 챔피온의 꿈을 꾸며 시골 마찻길을 매일 질주하고 있는 권투선수, 월드컵의 함성에 보답하기 위해 사선을 뚫고 있는 축구선수들, 최소한 신체적 고행(physical penance)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감내하고 있는 용맹정진의 도수나 긴장감은 고승들의 고행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퍼뜩 한 운동선수에게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금메달은 왜 따려 하는가? 일생을 보장받는 연금도 딸 수 있고 그래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고, 또 금메달 수를 하나 늘임으로써 국익에 보탬이 되면 나는 애국자가 될 테니까. 과연 금메달을 하나 더 첨가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금메달은 과연 국익에 보탬이 되는가? 엘리트 스포츠의 과도한 경쟁 속으로 점점 국가를 타락시키는 데 보탬이 되는 행위를 내가 자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금을 탔다고 하자! 과도한 훈련으로, 연금을 탄 직후에 관절이 다 파열되어 걷지도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고 하자! 격려의 환호성도 사라지고, 광고주들의 추근거림도 일시에 끊어지고, 친구들의 발길도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연금봉투만 걸머진 채 버림받은 고독한 한 인간으로 전락하였다고 하면 과연 젊은 날의 고행의 본질적 의미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시타림에 있었던 싯달타라는 한 인간에게 퍼뜩 찾아온 생각은 이러한 운동선수의 반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싯달타라는 고행자에게는 고행의 매우 명료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인도말로 목샤(mokṣa)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말로, 아니 정확하게는 중국말로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의 해탈목샤의 한역(漢譯)에서 유래된 것이다. 해탈이란 풀 해, 벗을 탈, 문자 그대로 풀고 벗는 것이다. ‘벗어버림이란 반드시 벗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벗음이란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벗음이다. 그 벗음의 대상을 우리는 윤회(輪廻)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인도말로 삼사라’(saṃsāra)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윤회는 삼사라라는 고대 인도어, 산스크리트 어휘의 한역인 것이다. 이것은 영어로 보통 트랜스마이그레이 션’(transmigration), 혹은 휠 어브 리버쓰’(wheel of rebirth)라는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윤회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금방, ‘내가 고양이가 되었다가 소가 되었다가 개미가 되곤 한다지?’하고, 사후의 세계에 관한 매우 비과학적인 논설로 오해하기가 쉽다. 허긴 황하(黃河)문명의 매우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세계관의 훈도를 받은 우리들에겐 이 윤회라는 생각은 얼핏 보기에 매우 생소한 것이다. 세계문명사의 지도를 펼쳐놓고 본다면 이 윤회라는 생각은 파미르고원의 동쪽의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것이었지만, 파미르고원의 서남쪽으로 펼쳐지는 모든 거대한 문명권에는 공통된 인간 삶의 이해방식의 기저였다.

 

사람이 죽어서 천당간다든가, 지옥간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주변에서 구태여 기독교를 들먹이지 않아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즉 사후에, 인간의 영혼이 되었든 기()가 되었든 그 무엇이 지속된다는 것은 모든 고대인의 세계관, 우리가 흔히 무속(巫俗, 샤마니즘)이라고 부르는 원초적 세계관의 공통된 기저였다. 그런데 윤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자의 존재의 지속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은 사람이 또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죽은 사람이 야마(Yama, 閻魔) 신의 세계나 천당에서 타 사자의 영혼들과 재회하고 그곳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살면 좋겠는데, 그 사자의 복락조차 영속이 보장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이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또 다시 인간세의 다른 생명체로 환생하게 되는가?

 

이러한 신비롭고 환상적인 이야기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의 논의는 지금 우리 과학적 세계관의 상식구조에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명료한 해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불교관을 수용한 신도들에게는 스님들의 법어가 그냥 먹힐 수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상식적 대중들에게는 윤회 운운하는 스님들의 법문은 예수부활 운운하는 목사님의 설교 못지않게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황하문명권의 사람들은 사후의 세계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몇천년을 건강하게 살아온 위대한 경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시골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양치기의 모습. 이 평범한 사진은 인도문명의 복합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이 할아버지의 얼굴에서도 목자 예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면,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이분적 이해방식은 때로 허구적인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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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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