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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인도에 망명정부를 연 달라이라마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만나기까지 - 인도에 망명정부를 연 달라이라마

건방진방랑자 2022. 3. 1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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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망명정부를 연 달라이라마

 

 

나는 귀국하는 대로 달라이라마를 만날 길을 모색했다. 한국에서는 최근 달라이라마 방한을 추진하는 운동이 있었으나 중국정부의 입김이 너무 거센 탓인지 우리 정부는 많은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방한의 기회를 허락치 않았다. 현재의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 1935~ )는 제14대 계승자이며달라이’(Dalai)큰바다’(Ocean)라는 뜻을 가진 몽고어이고, ‘라마’(Lama)는 스승이라는 뜻을 가진 인도어 구루’(guru)에 해당되는 티벹어이다. 그래서 달라이와 라마를 합하여 지혜의 바다’(Ocean of Wisdom)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달라이라마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이해방식은 역사적 정황을 정확히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라고 한다. ‘달라이는 제3대 달라이라마의 이름인 소남 갸초(Sonam Gyatso)갸초를 몽고말로 번역한 데서 생겨난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갸초는 티벹어로 바다라는 뜻을 갖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마를 중국사람들이 活佛’(huo-fo)로 번역하는데 이것 또한 매우 잘못된 이해방식이라고 지적한다. 티벹불교는 근본적으로 활불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 달라이라마의 본명은 라모 톤둡(Lhamo Thondup)이며 그것은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여신’(Wish-Fullfilling Goddess)의 뜻이다. 그의 고향 이름은 탁처(Taktser)인데 티벹의 동북부 변방의 암도(Amdo)지역에 속해 있다. 그의 부모는 작은 땅을 임대하여 삶을 영위했던 자작농이었다. 그는 193576일에 태어났다. ‘텐진 갸초라는 이름은 1940년 겨울 포탈라궁에서 티벹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공식취임한 후에 견습승려로서 득도할 때 받은 이름이다. 그때 타푸(taphue)라는 삭발의식을 거치게 되는데 당시의 섭정인 레팅 린포체(Reting Rinpoché)가 베풀었다. 그때 받은 풀네임이 잠펠 가왕 롭상 예쉐 텐진 갸초’(Jamphel Ngawang Lobsang Yeshe Tenzin Gyatso)였다. Dalai Lama, Freedom in Exile (New York : Harper Collins, 1991), pp.1~18 passim., 그는 1959년 중국정부의 압제를 못 이겨 80여 명의 호위단과 함께 히말라야 산길의 사경을 헤치면서 인도로 망명하였고, 망명정부를 인도의 북부지역인 다람살라(Dharamsala)에 정착시켰다. 그 후 40여 년간의 그의 줄기찬 비폭력적 독립의 호소는 세계양심의 심금을 울렸고 1989년에는 노벨평화상(the Nobel Peace Prize)이 주어졌다. 노벨평화상이 그를 빛낸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수상이 노벨평화상의 진정한 가치를 제고시켰다고 나는 믿는다.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저는 우리 티벹이 진실과 용기, 그리고 결단력을 무기로, 반드시 해방을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신념을 새롭게 다짐합니다. (1989,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문 중에서).

 

 

그는 티벹이라는 국가의 유일한 합법적 행정수반이며, 국민의 깊은 존경을 받는 정신적 지도자이다. 나 도올이 한 개인의 자격으로서 한 국가의 수반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더구나 의례적인 짧은 만남이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 사적으로 만나서 그의 내면의 정신세계를 파고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평범한 서생이다. 권위를 가진 일체의 직분이나 사회적 타이틀이 나에겐 한오라기도 없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달라이라마만큼의 어떤 지명도나 명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에게 나의 가치를 인식시킬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가 나를 만나야 할 필연성을 설득시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실적으로 매우 바쁜 사람이었다. 설사 날 만나고 싶다고 한다해도 그의 스케쥴은 그의 개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미 3년의 스케쥴이 다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했다.

 

 

내가 우리말로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의 티벹본. 종이 위에 금은가루로 쓴 것이다. 12.4×38.5cm, 화정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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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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