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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3부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 3장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목소리’,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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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를 만나다!

 

 

청왕조는 판첸라마를 황제의 스승으로 모시는 한편, 피서산장 근처에 황금기와를 얹은 전각을 마련해두고서 극진히 대접했다. 이렇게 판첸라마를 떠받든 것은 티베트의 강성함을 억누르기 위한 정치적 방편이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게 티베트 불교의 신성함을 존중하는 유목민의 유연한 태도 역시 작용했다. 그럼, 조선의 사행단은 어떠했던가? 청나라조차 오랑캐라고 보는 마당에 황당무계한티베트법왕에게 머리를 숙일 리 만무했다. 열하에서의 한바탕 소동은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름하여, ‘판첸라마 대소동!’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예부에서 조선 사신들도 판첸라마에게 예를 표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사신단은 머리를 조아리는 예절은 천자의 처소에서나 하는 것인데, 어찌 천자에 대한 예절을 번승(番僧)에게 쓸 수 있겠소[拜叩之禮 行之天子之庭 今奈何以敬天子之禮 施之番僧乎]?”하며 거세게 항의한다. “황제도 역시 스승의 예절로 대우하는데, 사신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었을 적에야, 같은 예로 대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皇上遇之以師禮 使臣奉皇詔 禮宜如之 ]”며 예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옥신각신하다, 결국은 현장까지 가긴 했으나 사신들은 당황한 나머지 카타를 바친 다음 절을 하지 않고 그냥 털썩 앉아버렸는데, 황제 옆에 있었던 군기대신 역시 황급하여 모른 체한다. 일행 중의 한 명이 일어나 팔뚝을 휘두르면서, “만고에 흉한 사람이로군. 제 명에 죽나 보자[萬古凶人也 必無善終理]”고 욕지거리를 해대자, 연암이 눈짓으로 만류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판첸라마는 조선 사행단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뜻으로 불상을 선물했다. 가지고 올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형세! ‘꿀단지에 손 빠뜨린 격이 된 것이다. “당시의 일이 창졸간이라 받고 사양하는 것이 마땅한지 않은지를 계교할 여가도 없었고[旣倉卒辭受當否 未暇計較]”, 게다가 저들의 행사는 번개치고 별 흐르듯이 삽시간에 끝나버렸기 때문에[彼所擧行爀熻 倐忽如飛星流電]” 손쓸 틈이 없었다.

 

물러나와 한참 대책회의를 벌이는 중 인파가 주위에 몰려들었는데, 개중에 황제의 첩자가 끼어 있었다. 조선 사신단의 행동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에 푸대접을 받은 것도 이 일로 인해 황제가 크게 언짢아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선 불상을 상자에 넣어 압록강에 빠뜨리기로 결정하면서 사태가 수습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가지고 들어왔다가 성균관 유생들이 이에 항의하여 권당(捲堂, 데모의 일종)’을 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해프닝의 연속!

 

그럼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1949년 중국은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수많은 인민을 학살했으며, 6천여개의 사원을 파괴하였다. 마침내 59년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을 단행한 뒤, 티베트 불교는 세계 속으로 퍼져 나갔고, 그 수장인 달라이라마는 근대 이성의 한계에 봉착한 세계인들에게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혜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청왕조에선 스승의 나라로 추앙받았으나, 지금은 식민지 속국으로 가차없이 짓밟히는 것도 그렇지만, 바로 그 중국 제국주의로 인해 티베트 불교가 히말라야 고원지대에서 세계사의 한복판으로 걸어나가게 되었으니, 역사의 이 지독한 역전과 아이러니 앞에서 그저 망연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 조선의 위치는 어떻게 달라졌던가?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 달라이라마의 방문을 거부하고 있는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다. 연암 시대에는 황제가 강제로 절을 하도록 시켜도 거부하더니, 이제는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라마와의 만남을 아예 묵살하고 있다. 몇 년 전엔 달라이라마가 몽고로 가기 위해 한국의 창공을 경유해야 했는데, 아시아나 항공사 측에서 그것조차 거부한 적도 있었다. 맙소사!

 

누군가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그러나 이 경우엔 정확히 그 반대다. 열하에서의 대소동은 다분히 희극적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상황은 음울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하긴, 전자가 비장한 코미디라면, 후자는 코믹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상통하는 바가 아주 없진 않다.

 

연암은 과연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아니, 연암이라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까? 연암이 달라이라마를 다시 만난다면?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숱한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것은 연암이 던지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달라이라마가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가쵸

1959년 중국의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다. 관음보살의 환생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연암이 열하에서 만난 판첸라마는 달라이라마의 전생에 해당되는 셈이다. 강연, 집필, 면담, 불교행사 주관 등이 그가 주로 하는 아르바이트다. 그 수입으로 다람살라에 몰려드는 난민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무슨 왕의 팔자가 이런가? 하지만 최악의 상황인데도, 그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천적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소망이라나, 그래서 웃음과 유머가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연암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그 역시 유머의 달인이다. 그가 근대 이성의 한계에 봉착한 세계 지성인들에게 끊임없이 지혜를 나누어줄 수 있는 원천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터이지만, 달라이라마는 내게 있어 영적 안내자이자 지적 스승이다. 그러니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판첸라마를 만나는 장면을 발견했을 때, 어찌 놀랍고 경이롭지 않았겠는가. 달라이라마께서 조선 사행단이 벌인 판첸라마 대소동!’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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