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론으로
다른 한편 버클리는 ‘물질’이란 실체를 제거하지만, 정신에 대해선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각하는 정신이 없다면 대체 경험이 어떻게 가능하겠으며, 지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버클리에게는 정신이란 실체만 존재하며, 이 실체가 지각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정신’이란 실체 앞에서 버클리는 유명론에 일종의 유보조항을 달아두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가 비판했던 로크처럼 말입니다.
요약하자면, 버클리의 주장은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의 유명론은 실재론에 대항하는, 반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흔히 유명론을 중세의 유물론이라고도 하지요. 로크의 유명론 역시 이런 성격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관념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 딜레마에 처했다고 해도 말입니다.
반면 버클리에 와서 유명론은 정반대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는 로크가 남겨두었던 물질이란 실체를 제거합니다. 사실상 이는 개체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유명론이 보편 개념의 실재성을 부정하지만, 개체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버클리의 이 작업은 양면성을 갖는 셈입니다. 유명론의 주장처럼 모든 보편 개념이 이름일 뿐이라면,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할 때 그 ‘실재성’ 역시 보편 개념이므로 이름일 뿐인 것으로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선 유명론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론이 본래 개체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면, 그래서 신학에 대항하는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면, 개체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버클리의 주장은 유명론의 부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식의 부정을 거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한다’, ‘지각한다’는 말조차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버클리 자신이 정신이란 실체를 예외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확인됩니다. 이는 유명론과 근대철학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곤란을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쨌든 버클리는 ‘물질’이란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정신과 그 정신이 지각한 것만을 세상에 남겨두었고, 그 결과 유명론은 관념론으로 전환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근대적 문제설정안에서 유명론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불가피한 행로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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